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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토리] 애민 군주 정조, 시흥행궁에 기록되다

09-30 22:42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는 수식어가 많은 왕이다. '개혁 군주', '애민 군주' 등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특히 그가 백성을 뜨겁게 사랑한 왕이라는 사실은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를 만나러 가는 행차인 능행(陵幸)을 많이 했다. 한양 창덕궁을 출발해 수원 화성을 거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 융릉까지 참배하러 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죄를 풀기 위해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고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 13년) 수원으로 이장해 '현부의 은혜에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뜻으로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했다. 그 자리에 있던 수원 관아는 팔달산 기슭으로 옮겨 신도시인 화성을 건설하고 행궁을 마련했다.

정조는 즉위부터 죽는 날까지 능행을 했다. 재위 24년간 태조의 건원릉을 가는 등 66회나 되는 능행을 했는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본래 능행 길은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 과천을 거쳐 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장헌세자의 처벌에 적극 간여한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 한우물 근처에 있어 금천과 안양을 거쳐 가는 길로 바꿨다 한다. 시흥행궁은 길이 바뀌고 난 뒤 임금이 머물고 가던 금천의 행궁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융릉으로 향하는 능행 길은 1795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기존 남태령을 넘어가는 길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아 거동하기 불편하며, 길을 관리하는 백성들의 고충이 심했다.

정조는 기존 능행 길의 폐단을 염려해 경기감사 서용보에게 시흥행궁 건설과 함께 시흥대로 건설을 추진케 했다.

아쉽게도 시흥행궁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지금의 금천구 시흥5동 주민센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근에 수령 800년 넘는 은행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올해 7월에는 시흥행궁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시흥5동 주민센터에 시흥행궁전시관이 개관했다.

원행로에 놓인 다리는 대개 나무로 조성했다가 행차 후 철거하는 것이 관례였다. 행차 때마다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평상시에도 백성이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영구적인 돌을 이용해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에는 만안교(萬安橋:1만 년 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시흥을 지났던 능행은 여러 일화를 통해 많은 미담을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정조는 시흥을 지나는 능행에서 수십 건의 상소를 받아 처리했다. 길에 지나는 각 고을의 백성과 수령을 불러 친히 고충을 듣고 민원을 해결해주기도 했다. 지역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준 것은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장면이다.

정조의 능행차를 행행(行幸)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백성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라는 의미가 있다. 백성이 국왕의 행차인 거가(車駕)의 '행림'(行臨)을 행복(幸福)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덕이 있으므로, 백성이 다 이를 행복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정조가 얼마나 백성을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 달 8일에는 3년만에 정조의 능행차가 재현되는 행사가 예정돼있다. 시흥행행을 비롯한 애민 군주 정조의 행차 전 코스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조의 애민 사상은 시흥에 이토록 잘 기록돼 있다.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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