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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스페셜] 김구 주치의 유진동 후손들의 삶 08-30 15:29

(충칭=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충칭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매우 특별했던 도시다. 오랜 피난 시기를 거치고 가족들과 함께 집단거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글로 '한인거주옛터'라고 적힌 비석이 그들의 숨결을 전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집을 짓고 농사일을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이들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유치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충칭은 습도가 높아 유독 폐렴 환자가 많았다. 궁핍했던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은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운 형편에 약을 사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40년대 이곳에 살던 한인 300여명 가운데 70여명이 폐병으로 사망했다. 비극적인 그들의 삶은 그렇게 곧 잊혔다.

독립운동가 이달(1907∼1942) 선생의 후손으로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철거 위기에서 지켜낸 이소심 여사는 "그냥 중국 사람으로 사는 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이 아닌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던지라 한국인인 걸 머리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단 거주촌에서 임정 요인 가족들을 돌보던 의사가 한 명 있었다. 김구 선생의 주치의이자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던 유진동(1908~?) 선생이다.

유진동 선생은 일찍이 상하이로 망명해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됐고 광복군사령부 군의처장을 겸임했다.

충칭에 남아 있는 후손은 유진동 선생의 큰딸과 막내아들이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는 자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를 이해했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해 늘 궁금한 게 있었다. 한국인인 걸 전혀 몰랐다. 1993년 김구 주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충칭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에게 아버지가 한국인이라고 얘길 해서 알았고 그때부터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됐다." (유수동씨, 유진동 선생 아들)

김구 선생의 측근이었던 만큼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았다고 한다.

유수동씨가 한국 정부로부터 2007년에 받은 기념패와 사진 속에서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 됐다.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유씨는 소중한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사진이다. 중국인 어머니를 한국인 아버지에게 중매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김구 선생이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유 선생은 김구 선생과 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수선한 해방정국의 끊이지 않는 파벌 다툼 속에서 김구 주석이 암살되자 결국 상하이로 떠나게 됐다.

중국이 공산국가였던지라 북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유 선생 일가는 북에서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었다. 이념으로 갈라선 조국은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유수동씨의 모친도 북한 공산당의 모진 고문으로 두 아들을 잃어야 했다. 남편 없이 홀로 남아 두 자녀와 가까스로 중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유수동씨는 북한에서의 생활은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부친인 유진동 선생 역시 북한 당국에 의해 평양의 한 병원으로 옮겨진 뒤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수많은 선열의 헌신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본다. 한국 젊은이들이 이런 부분을 알고 있었으면 한다." (유수동씨, 유진동 선생 아들)

유씨는 목숨을 걸었던 독립운동이 모두 끝났지만 병든 아버지가 혼자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시절 영문도 모르고 떠돌이의 삶을 살았던 어린 자녀들은 독립운동이라는 굴레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했고 누구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겪은 고초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의 밑거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레이션 : 케빈, 유세진 아나운서 ysjin@yna.co.kr>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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