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현장을가다] ④가난한 달동네가 벤치마킹 필수코스로
송고시간2023-06-10 06:05
순천 청수골, 한옥 개조 식당 만들어 주민들이 운영…맛집 소문 나며 문전성시
카페·한과공장으로 확대하며 경제적 자립기반 확보…마을기업 1호 인증
"지속 가능한 사회적경제 조직 모델"…연간 벤치마킹만 1만5천명
[※ 편집자 주 = 현대 도시의 이면 곳곳에는 쇠퇴로 인한 도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와 신도시 개발, 기존 시설의 노후화가 맞물리면서 쇠퇴는 갈수록 빠르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쇠퇴한 도시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주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도시 경쟁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도시재생은 쇠퇴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그치지 않고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도시의 재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연합뉴스는 모범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찾아 소개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순천=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전남 순천시 구도심의 끝자락에 있는 청수골은 마을 뒷산 계곡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고단한 삶이 배어 있는 가난한 달동네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인근의 향교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해방 이후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후 근래 들어 구도심의 쇠퇴가 시작됐고 이는 달동네 청수골에 더욱 혹독하게 다가왔다. 마을 뒷산 중턱에까지 터를 잡은 집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고 골목골목은 좁고 지저분했다. 하수도 보급률이 30%, 도시가스 공급률이 0%일 정도로 생활 인프라도 형편없었다. 젊은이들은 하나둘 떠났고 노인들만 남아 낡고 허름한 동네를 지켰다. 마땅한 일거리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으니 활기라고는 느껴볼 수가 없었다.
청수골은 그러나 2015년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면서 전국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해부터 2019년까지 5년 동안 68억원을 투입해 집을 수리하고 마을 입구에는 경로당과 공공화장실, 공동 작업장 등을 갖춘 커뮤니티센터를 신축했다. 주민 안전을 위해 노후 축대와 같은 재해 위험시설을 정비하고 소방도로와 골목길을 확충했다. 마을 곳곳에는 주차장과 정원을 만들고 둘레길을 조성했다. 커뮤니티센터에서는 도자기공예, 한글 문해, 요가, 사물놀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평생 열악한 환경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주민에게 조금씩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주민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주면서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도 시작됐다. 전문가들이 투입돼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주민 교육이 이뤄졌고 청수정협동조합이 구성됐다. 청수정협동조합은 2018년 첫 사업으로 동네 입구의 비어있는 100년 가까이 된 한옥을 개조해 식당을 만들었다. 어머니들이 평생 해온 음식으로 승부를 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긴가민가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맛집이라는 소문까지 나면서 손님이 줄을 이었다. 지금은 으레 순서표를 받아 들고 10∼20분을 기다려야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다.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했던 청수정은 2021년 연매출액이 1억2천만을 넘겼고 지난해에는 2억2천만원을 돌파했다. 올해는 3억원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주 6일 영업에 점심만 팔아 올린 실적이다. 청수정협동조합은 이곳에서 일하는 주민들이 모두 고령인 점을 고려해 아침이나 저녁 식사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테이블도 8개에 불과하고 주요 메뉴도 정식과 꼬막비빔밥 등 2∼3가지뿐이다.
청수정의 성공은 어머니들의 정성과 정갈한 음식에 좋은 식재료가 더해진 결과다. 주민들은 가급적 공동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로 반찬을 만든다. 나머지 재료도 대부분 순천지역에서 생산된 것들을 쓴다.
청수정을 종종 찾는다는 이영순(60)씨는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그리울 때면 오곤 한다"며 "언제 먹어도 음식이 물리지 않고 맛이 있다"고 소개했다.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와봤다'는 장혜진(50)씨는 "먹어보니 왜 손님이 끊이지 않는지 알 것 같다"면서 "편안한 분위기에 정갈하고 담백한 맛이 그만이다"고 말했다.
식당 옆의 커뮤니티센터 한쪽에 연 카페도 덩달아 문전성시를 이룬다. 식사를 마치고 차 한잔을 하려는 손님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테이블 4개 남짓한 작은 공간은 점심시간이면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청수정은 주민에게는 어엿한 일터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모두 60세를 넘긴 5명의 주민이 일한다. 80세를 바라보는 주민들도 있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나이이기에 더욱 소중한 일자리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 6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140만원가량을 받으니 벌이도 괜찮은 편이다. 동네와 주민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도 크다. 청수정의 수입 가운데 60%가량만 인건비 등으로 쓰고 나머지 40%는 마을에 환원해 적립하거나 반찬 나눔, 불우이웃 돕기 등 좋은 일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청수정에서 일하는 주민 최영숙(66)씨는 "집에서 가깝고, 점심 일만 하니 아직은 할 만하다"며 "평생 얼굴 맞대고 살아온 이웃들과 함께 일하니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다"고 말했다.
대표 역할을 하는 백정숙(78)씨는 "집에 있으면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무료할 텐데 시간도 잘 가고 용돈벌이도 된다며 만족해한다"면서 "청수골을 널리 알리고 주민과 마을을 위해 좋은 일도 하니 일할 맛이 난다"고 거들었다.
청수정의 성공은 이제 한과 공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수골 애(愛) 오란다'라는 이름의 한과 강정 공장을 지난해 만든 것이다. 주민들이 새로운 수익 창출을 위해 시험 삼아 만들어 판 한과가 인기를 끌자 아예 공장을 지었다. 150㎡ 남짓한 한과 공장은 식품 안전 관리 인증을 받아 이르면 8월께 가동에 들어간다. 이미 청수골 카페뿐만 아니라 순천 시내 벼룩시장과 온라인 예약 판매로까지 판로가 확대되고 있어 자리를 잡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과와 함께 발효 음료도 생산할 예정이어서 10명 이상의 주민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자신감을 얻은 주민들은 동네에서 대보름축제와 벚꽃축제, 작은 음악회와 같은 크고 작은 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특히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쯤 여는 '청수골 팡팡 벚꽃축제'는 인근 문화의 거리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작가들까지 참가해 청수골을 알리고 있다. 마을에 활기가 넘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사이에 청수정 협동조합은 한 단계 발전한 마을기업으로 성장했고 조합원 수도 5명에서 18명으로 늘며 안정적인 자립 기반을 갖추었다. 이는 도시재생사업 과정에서 만들어진 전국의 수많은 협동조합과 시설들이 정부 지원이 끊기기 무섭게 해체되거나 문을 닫는 것과 다른, 결정적 차이점이다.
청수정협동조합 신영(61) 이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별달리 배운 것도 없는 달동네 노인들이 일궈낸 성과라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더디더라도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청수골에는 최근 작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마을 입구에 개인 카페가 문을 연 것이다. 청수골을 찾는 방문객이 날로 늘다 보니 이를 겨냥한 것이다.
임창우 순천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사무국장은 "달동네에 카페가 들어설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다"면서 "비록 작은 카페 하나지만 청수골을 찾는 이가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고, 청수골 도시재생사업이 그만큼 건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청수골은 도시재생사업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선진 견학지로 꼽힌다. 청수골의 성공 사례를 배우기 위해 2019년 한해에만 전국에서 각급 기관, 단체, 마을 관계자 1만5천700여명이 다녀갔다. 이는 각종 수상 실적에서도 확인된다. 청수골은 국토교통부 평가에서 2018년부터 3년 연속 최우수기관에 선정됐고 행정안전부로부터는 '도시재생 1호 마을기업' 인증을 받았다.
임 사무국장은 "주민의 자발적 참여 속에서 안정적 수익 구조를 갖춘 마을기업을 만들어 일자리와 주민 소득을 창출해낸 사례"라며 "경제적 선순환 구조를 갖춘 도시재생형 사회적경제 조직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doin100@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3/06/10 06:0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