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매화와 동백
송고시간2023-04-19 08:00
설한 이기고 봄을 예고하는 두 전령
(광양 여수=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동양을 대표하는 꽃이라면 매화와 동백이 아닐까 싶다. 두 나무는 모두 한국, 중국, 일본이 원산지이다. 모진 추위를 이기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매화, 동백꽃은 선비의 절개, 용기, 의지, 희망과 기다림을 상징해 예부터 동아시아에서 고결한 존재로 여겨졌다.
◇ 동양의 상징…매화와 동백꽃
서양에서는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매화의 영어 이름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화를 뜻하는 영어는 'plum blossom'(자두꽃)이다. 매실이 자두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붉고 고운 꽃과 짙고 두꺼운 녹색 잎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동백은 동서양 무역이 활발했던 근대에 유럽으로 수입돼 상류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백 열풍은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La Dame aux camelias),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낳았다. 'La Dame aux camelias'는 '동백꽃 여인'이란 뜻이다.
눈과 서리 속에서 피는 매화는 봄을 알리는 전령이다. 10월부터 4월까지 꽃을 피우는 동백은 삭막한 겨울에 화사한 봄빛을 선사한다. 봄에 피는 동백을 춘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선비들이 사랑한 매화
성리학을 체계화한 대학자인 퇴계 이황은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말했다. 그만큼 매화를 흠모했다. 퇴계 선생은 평생 72제 107수의 매화 시를 남겼다. 이중 62제 91수를 손수 써서 '매화시첩'이라는 책으로 묶기도 했다.
조선 중기 학자 상촌 심흠(沈欽) 선생은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 不賣香)고 했다. 퇴계 선생은 도산서원에 매화나무를 심고 싶어 했다. 선생의 매화 사랑은 사물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 매화를 가꿈으로써 그 어떤 것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1천 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퇴계의 초상화와 함께 매화 그림이 있다. 신사임당 초상화가 그려진 5만 원권의 뒷면에는 조선 중기 서화가 어몽룡이 그린 월매도가 인쇄돼 있다. 한국인의 뿌리 깊은 매화 사랑을 엿보게 한다.
◇ 국내 최대 매실 재배지, 광양
한반도에는 곳곳에 매화가 자생한다. 그러나 오랜 수령의 매화나무가 그리 많지는 않다. 매화나무는 줄기가 굵거나 강하지 않은 데다 전쟁 등 근현대 격변기를 거치면서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매화나무는 은근한 품격을 발산하며, 그에 걸맞은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선암사 선암매, 장성 고불매, 전남대 대명매, 담양 계당매, 소록도 수양매는 '호남 5매'로 불린다.
단속사 터 정당매, 산천재 남명매, 남사마을 원정매는 경남 '산청 3매'이다. 정당매는 수령이 약 650년으로 최고령 매화로 꼽혔으나 10여 년 전 본줄기가 고사했다. 고사 직전에 본줄기 옆에 심었던 이 나무의 가지가 자라 요즘도 봄이면 꽃을 피운다.
한국의 산지승원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선암사에 피는 선암매가 현재 최고령 매화나무로 여겨진다.
전남 광양은 고매의 기품과는 또 다른 매화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일조량이 많은 광양은 국내 최초, 최대 매실 집단 재배 지역이다.
광양의 주산인 백운산(1,222m) 기슭에는 단일 매실 농원으로는 규모가 큰 청매실 농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 봄 농원에 들어서면 눈길 닿는 산자락마다 백매, 홍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길손을 반긴다.
천지사방에 고고하고 귀한 매화꽃이 만개해 눈은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호강을 한다. 4만5천여 평에 이르는 농원과 그 일대는 매화마을이라 불린다.
개화가 절정에 이르는 3월 중순 매화마을에서는 큰 축제가 벌어진다. 감염병 때문에 미뤄지던 축제가 올해 4년 만에 열렸다. 열흘인 축제 기간이 아니어도 3월 내내 농원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많다. 매화 개화기에 농원을 찾는 관광객은 약 100만 명에 이른다. 광양 인구가 15만 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매화 필 무렵 광양이 얼마나 들썩일지 가늠할 수 있다.
백운산은 전라남도에서 지리산 노고단 다음으로 높고, 광양시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크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마주 본다. 매화마을은 백운산을 뒷배로 하고, 앞으로는 물 맑은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섬진강 건너는 경남 하동이다. 4월이면 벚꽃이 섬진강 변과 하동을 장식하며 다시 한번 탐방객을 유혹한다.
◇ 감추어진 아름다움, 동백
눈 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은 문인과 학자들로부터 설중매 못지않은 관심을 끌었다. 시인 정훈(1911∼1992)은 '백설이 눈부신/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불이 붙는다'고 동백의 강인함을 절창했다.
동백은 아름다움과 꽃 속의 꿀 당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꽃송이째 땅에 툭 떨어진다. 볼품없이 시든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면서 사그라드는 여느 꽃과 비교된다. 그래서 동백은 세 번 핀다고 일컬어진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한 번, 사람의 마음속에서 한 번이라는 것이다. 따뜻한 남쪽 지방과 서해안에는 동백나무 군락지가 곳곳에 있다.
부산에 사는 이해인 수녀는 필 때도 질 때도 아름답고 고운 동백꽃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토로한 바 있다. 동백꽃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색깔이 붉고 선명하지만, 사철 무성한 가지와 짙은 초록 잎사귀 속에서 다소곳할 뿐 자신의 화려함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않는다.
◇ 옥룡사 터와 오동도
부산 동백섬과 태종대, 거제 지심도, 고창 선운사, 해남 대흥사, 강진 백련사 등은 대표적인 동백나무 자생지이다.
광양 매화마을에서 멀지 않은 옥룡사 터와 여수 오동도도 동백꽃을 감상할 수 있는 명승지이다. 옥룡사 동백나무 숲은 백운산 지맥인 백계산 남쪽에 있다.
신라 말의 승려이자 비보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827∼898)이 동백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 역사적인 숲이다. 비보 풍수는 지리적 경험을 바탕으로 땅의 약한 기운을 북돋우고, 강한 기운을 눌러 자연과 조화를 도모한다. 도선은 옥룡사를 중수하면서 땅의 기운이 약한 쪽을 보강하기 위해 동백나무를 심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인공조림지인 셈이다. 옥룡사 터에는 수백 년 수령의 동백 1만여 그루가 자란다.
섬 전체에 동백나무 3천여 그루가 빼곡해 동백섬으로도 불리는 오동도는 꽃 섬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백이 1월부터 피기 시작해 3월에 만개하는 오동도는 여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날에 오동나무가 많았던 오동도는 한려수도의 서쪽 시작 점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3/04/19 08: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