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불국토(佛國土), 동남산 가는 길
송고시간2023-04-07 08:00
불교 문화재와 신라 유적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여정
(경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경주에서 남산은 서울로 치자면 백악산(북악산), 인왕산쯤에 해당한다. 수도를 지키는 요새인 동시에 그 안에서 삶을 꾸려 가던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영산이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왕성이었던 월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 신라의 영산, 경주 남산
금오봉(468m), 고위봉(494m) 등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북이가 월성 코 앞까지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동서 너비 4㎞, 남북 길이 9㎞로,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다. 계곡이 50여 개에 이르고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룬다. 작지만 표상하는 바가 크고 깊은 산이다.
남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우물인 나정, 왕릉 13기, 남산신성을 비롯한 산성 4곳, 초기 왕궁,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 등 신라의 주요 역사 유적들이 즐비하다.
또 불교 문화재가 유독 많다. 절터 150여 개소, 불상 130여 구, 탑 100여 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이 남아 있다. 이는 신라인들이 남산을 부처님이 사는 곳, 즉 불국토(佛國土)라 여기고 신성시한 데서 연유한다.
지금까지 남산에서 발견된 문화유산 700여 점은 남산, 신라, 신라인들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웅변한다. 남산은 신라의 천 년 역사를 함께 했다. 유네스코도 이를 높이 평가해 지난 2000년 남산을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렸다. 산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례는 달리 찾기 어렵다.
◇ 역사, 예술, 자연과 만나는 동남산 길
나지막하고 곳곳에 역사의 자취가 서린 남산에는 탐방로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남산의 동쪽으로 나 있는 동남산 길은 풍성한 역사 유적과 찬란한 불교 예술, 소나무 울창한 산야의 고즈넉함에 흠씬 젖을 수 있는 여정이다.
월정교에서 시작해 남산동 동서삼층석탑까지 계속되는 이 길은 남산 기슭의 둘레길로, 동남산의 구석구석으로 이어진다. 경주 시민들은 남산의 동쪽을 동남산, 서쪽을 서남산이라고 부른다. 길은 편도 8㎞ 정도인데 유적과 문화재를 얼마나 꼼꼼히 둘러보느냐에 따라 걷는 시간과 거리는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동남산 코스에서는 국내 유일의 누교(樓橋)인 월정교, 최치원이 살던 집인 상서장, 신라 최초의 석불인 불곡마애여래좌상, 탑곡마애불상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헌강왕릉, 정강왕릉, 서출지 등의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최근에 경상북도 지방 정원으로 지정된 산림환경연구원, 청소년 연수 시설인 화랑교육원,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고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한 통일전 등 현대에 들어선 문화시설과 기념관도 눈길을 끈다.
동남산 길을 걸으면 직접 탐방할 만큼 가깝지 않더라도 멀리서 시야에 들어오는 유적지가 한둘이 아니다. 월정교 건너편은 신라 궁성인 월성이다. 월성의 토담과 나무들은 동남산을 걷는 내내 길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민간 주도로 설립된 전시관이 그 전신인 국립경주박물관은 인왕동 들판에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멀리 보이는 송화산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묘가 있고,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선도산은 송화산과 이웃하고 있다.
선덕여왕릉, 그의 아버지 진평왕의 능, 신문왕릉도 그 위치를 식별할 수 있다. 왜구로부터 바다를 지키기 위해 동해에 장사 지낼 것을 유언했던 문무왕의 화장지로 추정되는 능지탑은 멀리서도 뚜렷이 관찰된다.
호국사찰이었던 사천왕사 터, 당나라 사신에게 호국사찰 건립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은 망덕사 터, 고구려에서 왕의 아우를 구한 뒤 왕의 또 다른 동생을 구하기 위해 집에 들르지 않은 채 일본으로 바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하던 부인이 울부짖다 다리가 굳었다는 장소인 벌지지가 동남산 길에서 멀지 않았다.
◇ 밤길도 오래 걷다 보면 새벽을 맞이한다
옛이야기만 풍성한 것은 아니었다. 한글 보급에 평생을 바쳤던 최햇빛 선생이나 세계 최초로 어린이 박물관 학교를 연 고청 윤경렬 선생의 유적과 기념관은 경주 시민들의 남다른 역사, 문화 의식을 대변하는 듯했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한글 보급에 사비를 들여가며 왜 그리 열심이냐는 질문에 최햇빛 선생은 '밤길도 오래 걷다 보면 새벽을 맞이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새긴 '새벽비'는 양지바른 길가에 세워져 나그네들에게 한글 사랑을 일깨우고 있었다.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겨레의 얼을 찾아 경주로 온 고청 선생은 천년고도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신라문화동인회를 창립해 수많은 문화유산 보전 활동을 했다. 1954년 그가 열었던 어린이 박물관 학교는 국립경주박물관 내 부설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수천 년 고도인 경주는 땅을 파면 유물이 안 나오는 곳이 없다고 흔히 말한다. 혹시라도 땅속에 묻힌 유물이 무심한 발길에 부서지지 않을까 저어해 그가 평생 고무신을 신고 다닌 것은 경주 문화계에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 보석처럼 총총히 박혀 있는 문화유적들
동남산 길에서 만나는 문화재, 유적들은 밤하늘의 별을 떠올린다. 그만큼 촘촘하게 산재해 있고, 예술성으로 또렷하게 빛난다. 월정교는 월성을 감싸고 흐르는 남천 위에 놓인 다리이다. 서라벌 남쪽에서 왕경의 도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발굴 조사 결과 교각 4개, 길이 63m, 폭 12m의 회랑 형태의 누각형 다리임이 확인돼 그렇게 복원됐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9년(760년)에 월정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천 년 역사 중 정치, 문화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번영했던 시기인 경덕왕 때 신라는 18만 호 규모의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1호의 가족을 5명으로 잡을 때 18만 호의 인구는 100만 명에 가깝다. 서기 8세기쯤에 인구 100만 도시는 세계에서 경주, 중국 시안(西安), 바그다드, 이스탄불 등 4개밖에 없었다.
불곡마애여래좌상은 너비 4.5m, 높이 3.2m 정도 되는 바위에 무지개 모양의 감실을 파고, 시골 할머니처럼 인자한 모습으로 새긴 부처님이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로, 석굴사원의 선행 양식으로 일컬어진다.
탑곡마애불상군은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유달리 아름다운 옥룡암 뒤에 있다. 높이 10여 m, 둘레 40여 m 암벽에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처님의 세계를 새겨 놓았다. 7층·9층 목탑, 설법하는 부처님, 너울너울 춤추며 나는 비천, 공양 올리는 스님의 조각상들은 1천500년의 세월을 견뎌서인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환상적인 세계로 초대하는 듯하다.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얼굴 부분의 조형미가 뛰어나 통일신라 시대에 찬란했던 예술 수준을 실감하게 한다.
서출지는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하는 작은 연못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21대 비처왕(소지왕)은 서출지에서 나온 편지 덕분에 역모를 차단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한다. 정월 대보름에 온갖 일을 삼가고 오곡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세시풍속은 서출지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남산동 양피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서탑은 석가탑에 버금가는 조화와 균형을 갖춘 아름다운 탑이다. 상층 기단에 조각된 팔부중 상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동탑은 이중의 지대석 위에 세운 모전 석탑이다.
동탑은 꿋꿋하고 힘차게 솟아 있고, 서탑은 부드럽고 화려하다. 형식을 달리하며 조화롭게 서 있는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을 연상시킨다. 남산 길은 현대인을 선인의 빛나는 역사와 그윽한 신앙의 세계로 이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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