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만난 두 사람의 낭만적 유대…영화 '6번 칸'
송고시간2023-02-23 08:00
(서울=연합뉴스) 김정진 기자 = 라우라(세이디 하를라 분)는 핀란드에서 온 모스크바 유학생이다. 연인 이리나(디나라 드루카로바)가 평소 동경하던 암각화를 보기 위해 무르만스크 여행을 계획하지만, 홀로 기차에 탑승하게 된다.
라우라가 올라탄 기차의 6번 칸, 이리나가 있었어야 할 자리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있다. 료하(유리 보리소프)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들어서자마자 보드카를 연신 들이킨다.
2021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인 영화 '6번 칸'은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기차의 6번 칸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다. 첫 만남에서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이 감돌던 두 사람이 꼬박 3일의 시간을 함께하며 맞는 변화를 그린다.
라우라는 료하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식당 칸에서 시간을 보내려 한다. 그러나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라는 직원의 말에 다시 6번 칸으로 향한다. 잔뜩 술에 취한 료하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술주정을 해댄다. 라우라는 결국 그의 무례함에 폭발하고, 칸 변경을 요청하지만, 승무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라우라에게 자꾸만 말을 거는 료하, 그런 그와 거리를 두고 싶은 라우라. 두 사람은 서로를 '이상한 남자', '따분한 사람'으로 여긴다. 커다란 광산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무르만스크로 간다는 료하와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온 라우라의 세계에는 접점이란 존재하지 않고, 둘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러 정차역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표류하던 라우라의 눈빛은 점차 단단해져 간다.
이들의 관계는 로맨스라는 단어로 묶이지 않는 유대를 보여준다. 여행 도중 만난 낯선 사람과 설렘, 사랑을 그린 여타 영화들과 '6번 칸'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담담하게 그려졌지만 유쾌함도 놓치지 않았다. 료하의 생리 현상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라우라, 료하가 투박하게 그린 라우라의 얼굴, 끝까지 핀란드어로 '사랑해'를 '엿 먹어'(Haista vittu)로 알고 있는 료하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199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 위에 그려진 낭만적인 영상미도 주목할 만하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그때의 감성을 스크린에 담아내기 위해 35㎜ 필름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영상에 입혀진 아날로그한 질감 위에 펼쳐진 러시아의 드넓은 설원, 그 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을 연기한 두 주연배우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라우라 역의 세이디 하를라는 외지인 라우라의 고독과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해냈다. 유리 보리소프는 극 초반 료하의 거친 모습부터 라우라를 향한 순수함과 따스함을 매력적으로 드러낸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급류를 향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흐르다가 둘 사이의 좁은 틈 사이를 으르렁거리며 마침내 고요한 호수 표면으로 흘러가는 강과 같다"면서 "내 목표는 모든 부조리 속에서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면서 관객을 영화관 밖으로 안내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3월 8일 개봉. 107분. 15세 관람가.
stop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3/02/23 08: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