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사실이 아니라 관념에 불과"…신간 '백인의 역사'
송고시간2022-11-17 10:18
미국 역사학자 넬 어빈 페인터가 쓴 인종차별의 역사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익숙지 않은 타인에 대한 혐오는 역사적으로 늘 존재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북쪽에 사는 스키타이인을 할례와 마약에 찌든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로마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게르만 일족인 수에비족에 대해 "어릴 때부터 강제나 규율이라고는 모르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며 경멸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장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인종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인종 차별이 만연해졌다.
넬 어빈 페인터 미국 프린스턴대 미국사 명예교수가 쓴 '백인의 역사'(해리북스)는 인종차별의 엄혹한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그는 "인종은 사실이 아니라 관념이며, 따라서 인종을 둘러싼 물음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관념의 영역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에서 인종 관념이 싹트기 전에는 노예제가 사회를 지탱했다. 그리고 힘든 일을 하는 노예들은 사회적으로 차별 대상이었다.
11세기까지 바이킹은 북유럽과 러시아를 돌며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포획해 노예로 팔았다. 바통은 십자군 왕국들이 이어받았다. 13세기에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이들은 발칸반도 거주자인 슬라브인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노예'(Slave)라는 낱말이 '슬라브'(Slav)에서 파생될 정도로 당시 인신매매는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어 이탈리아 상인, 오스만튀르크 상인이 유럽 노예무역을 독점했고, 아메리카가 개척되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신흥 노예무역 강국으로 떠올랐다.
18세기 칼 폰 린네가 주저 '자연의 체계'를 통해 생물들을 분류하면서 유럽의 학자들도 본격적으로 인종을 구분했다. 몽골인 유형의 칼미크인, 미인으로 유명한 조지아인 등 다양한 인종 구분법이 등장하며 차별의 강도를 높였다.
흑인·황인뿐 아니라 허드렛일을 하는 백인에 대한 차별도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아일랜드인이 경멸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미국 지성을 대표하는 랠프 윌도 에머슨은 아일랜드인을 아메리카 인디언, 중국인과 동일선상에 놓았다. 20세기에는 미국에 이민 온 남유럽과 동유럽인들이 아일랜드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앵글로색슨족은 미국 인종 위계의 최상단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떠돌이, 사냥꾼, 가난한 농민, 도시 빈민도 상당했다. 이들의 존재는 인종 위계 논리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인종주의자들은 해결책으로 '유전학'을 들고나왔다. 그들이 유전적으로 퇴화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버지니아주는 1924년 '강제 불임법'이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 대상은 '유전적으로 퇴화한' 앵글로색슨 부랑자들이었다. 1968년까지 6만5천여 명의 미국인이 이 법에 따라 강제 불임시술을 받았다.
지능지수 차이로 인종을 구분하기도 했다. 1922년 로스럽 스토더드는 '문명에 맞선 반란: 하등 인간의 위협'에서 미국인의 IQ를 평균 106으로 책정했다. 이탈리아인은 84, 유색인은 83으로 규정했다. 우월함 비율은 잉글랜드인 19.7, 아일랜드인 4.1, 이탈리아인 0.8, 폴란드인 0.4였다. 현재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같은 평가가 이뤄졌다.
저자는 "인간종의 기원은 약 1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있다.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서 진화한 것이다. 인종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인간의 부단한 이주 때문에 우리는 다인종 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 "백인성의 반대로써 검은 피부의 가난은 지속되고 있다. 그 배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영원한 타자로,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으려는 오래된 사회적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덧붙인다.
조행복 옮김. 5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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