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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고도의 정치ㆍ외교력 요구되는 강제동원 해법

송고시간2022-08-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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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앞 기자회견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
외교부 앞 기자회견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

(서울=연합뉴스) 김승두 기자 =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가 14일 오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민관협의회 2차 회의를 마치고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7.14 kimsdoo@yna.co.kr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논설실장 =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배상을 둘러싼 갈등은 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교 정상화와 전후 보상 문제의 해결을 위해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당시 양국은 식민지배 과거사에 대한 인식 공유를 이뤄내지 못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통치는 불법이며 추후 국제법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우리의 입장과 달리 일본은 대한제국의 동의에 따른 합법적 절차를 통해 한일병합 등이 이뤄졌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런데도 이 조약에 부속하는 '청구권협정'에서는 일본이 한국 내 자산 및 제반 권리를 포기하고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10년간 지원하는 대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내용이 담기는 타협이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 측의 가해 인정과 사죄를 끌어내지 못한 채로의 타협 여파는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을 둘러싼 극한 갈등이 그것이다. 한국 대법원의 개인 배상 명령을 미쓰비시중공업 등 가해(전범) 기업들이 거부하면서 이들 기업의 국내 자산이 결국 압류되기에 이르렀고, 조만간 배상금 용도로 특별현금화(매각)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 측은 강제 매각 시 한ㆍ일 관계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한다.

피해자 개인 배상 쟁점이 전면화한 것은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서 비롯됐다. 당시 대법원은 "청구권협정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철저히 부인했다"며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과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은 소멸 또는 포기된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청구권협정으로 배상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과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과 11월 각각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 명령이 나왔다. 역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가해 기업들이 배상 이행을 거부하면서 이들 기업의 특허권 등 국내 자산이 압류됐다. 압류 자산의 현금화 여부는 이르면 이달 중 대법원 판단이 나올 예정이다.

다행히 대법원이 지난 19일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 매각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일단 미뤘다. 한ㆍ일 양국으로서는 한숨 돌렸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00일 회견에서 "강제징용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왔고 그 판결 채권자들이 법에 따른 보상을 받게 돼 있다"면서도 "다만 그 판결을 집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지금 깊이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도의 정치력과 외교력이 발휘돼야 할 시점을 맞은 셈이다.

우리와 달리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측 가해 기업들과의 '화해'를 이뤄낸 역사가 있다. '하나오카 화해'가 대표적이다. 1945년 6월 30일, 일본 아키타현 오다테시 교외의 가시마구미(가시마건설의 전신) 하나오카 구리 광산에 끌려와 강제 노역을 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이 광산의 하나오카 출장소에 배치돼 하나오카 강 개수공사에 동원돼있던 중국인 노동자 986명이 혹사와 굶주림 끝에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강제 진압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했다. 폭동 이전의 혹사와 학대, 기아로 사망한 이들을 합쳐 총 418명의 중국인이 이 광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패전 후 연합국은 관련자들을 요코하마 BC급 전범재판에 넘겼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간 합의가 이뤄진다.

생존자 유족은 1989년 가시마건설에 1명당 500만엔, 1천 명의 피해자에 총 50억 엔의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협상을 거쳐 이듬해 7월 합의 내용을 공동발표했다. 발표에는 중국인이 광산 현장에서 받은 고통은 일본 각료회의 결정에 따른 강제노역이라는 사실, 가시마건설의 책임 인정과 중국인 생존자ㆍ유족에게 사죄, 문제의 조기 해결 다짐 등이 포함됐다. 이어 우여곡절을 거쳐 도쿄 고등법원장과 도이 다카코 등 유력 정치인들이 최종 화해를 주선했다. '하나오카 화해'의 배경에는 일제 침략전쟁 등 과거사를 둘러싼 인식 수렴을 이뤄낸 1972년 중ㆍ일 국교 수립이 있었다. 당시 공동성명에는 "일본 측은 과거에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해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한국 외교부는 이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자 민관협의회를 출범해 3차례 회의를 열었다. 민관협의회는 '대위변제 안'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먼저 배상금을 지급하고 추후 일본 기업이 참여한 기금 등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안이 유효한 해법이 되려면 일본 기업의 사과와 기금 참여가 포함되지 않는 방안은 수용할 수 없다는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자의 청구권 문제가 청구권협정으로 해소된 만큼 기금 조성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와 기업 등 양측을 설득해야 한다. 피해자를 외면한 설익은 타협은 2015년 한ㆍ일 위안부 합의처럼 후폭풍을 낳을 수 있다. 적어도 가해 기업에 대해 '피해자의 권리구제 요청에 응하지 말라'는 일본 정부의 지침이 철회돼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를 모색할 수 있도록 길을 터는 외교 노력이 절실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해자의 책임 인정과 사죄, 배상, 교훈의 후세계승 등 '화해의 3원칙'이 관철되면 최선이겠지만, 어떤 해법도 현실적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고려돼야 한다.

sh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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