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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숭숭 뚫린 러시아 제재…원유 '상표갈이' 우회 수출 성행

송고시간2022-04-16 06:10

러시아산 49.99% 섞은 '라트비안 블렌드' 제품 버젓이 판매

폭락 루블화 가치도 반등…"에너지 수출이 루블 가치 지지"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허점이 노출되고 있다.

러시아의 석유시추 장비 [타스=연합뉴스 자료사진]
러시아의 석유시추 장비 [타스=연합뉴스 자료사진]

러시아산 원유를 50% 미만 비율로 섞은 석유제품을 마치 다른 상표인 것처럼 판매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피하는 게 대표적이다.

개전 직후 서방이 금융제재를 시작하자 가치가 폭락했던 러시아 화폐 루블의 가치도 최근 전쟁 이전 수준까지 반등하면서 에너지·식량 대국인 러시아를 겨냥한 제재의 실효성에 회의론이 제기된다.

◇ 러시아산 원유 49.99% 섞어 팔며 교묘하게 제재 회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유럽 최대 석유회사 셸은 다른 나라산(産) 원유 50.01%에 러시아산 원유 49.99%를 섞은 석유제품을 유럽 시장에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판매하는 석유제품은 러시아산 혼입 비율이 50% 미만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러시아산 제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방의 제재를 피할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이런 제품을 석유 거래업자들은 보통 '라트비안 블렌드'(Latvian Blend)라고 부른다.

러시아의 대표적 석유 수출항인 프리모르스크에서 출발한 선박이 대형 석유 저장시설이 있는 라트비아의 벤츠필스항에 도착해 하역한 뒤 이곳에서 혼합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셸 로고 [타스=연합뉴스 자료사진]
셸 로고 [타스=연합뉴스 자료사진]

러시아산 원유를 다른 나라산과 섞는 작업은 종종 네덜란드의 석유 터미널이나 공해상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석유 거래상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석유제품을 통칭해 '라트비안 블렌드'로 부른다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

이런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셸과 같은 거대 석유회사들이 과거 서방의 제재 대상이던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다른 나라 원유와 섞어 판매할 때는 '말레이시안 블렌드' 또는 '싱가포르 블렌드'라 불렸다.

서방의 제재를 받는 산유국들의 생산 물량을 우회해 판매하기 위한 이런 수법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안 되지만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소지가 있다.

지난달 우크라이나 외교부는 셸의 트레이더가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러시아 우랄산 원유를 구매한 사실을 파악하고 거세게 항의해 셸이 공식 사과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유럽과 러시아 간 에너지 거래는 서방의 제재 발효 이후에도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은 380억 달러(약 47조 원) 상당의 러시아산 에너지를 구매했다고 보도했다.

이 중 30%가량의 물량은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유통됐는데도 우크라이나는 이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구멍 숭숭 뚫린 러시아 제재…원유 '상표갈이' 우회 수출 성행 - 3

◇ 폭락했던 루블화 가치도 반등…러시아 제재 효과 있나

14일(현지시간) 미국 CNBC 등에 따르면 이날 모스크바 외환시장에서 미 달러화 대비 루블화 환율은 80.12루블로 마감, 거의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루블화 가치는 일련의 서방 제재로 인해 한때 사상 최저인 달러당 121.5루블까지 떨어진 바 있다.

블룸버그는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이 루블 가치를 떠받치는 한 러시아 정부와 올리가르히(신흥재벌)에 대한 서방의 제재와 서방 기업의 연이은 탈(脫)러시아 행보가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진단했다.

블룸버그 산하 경제연구소인 블룸버그 이코노믹스(BE)는 올해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액이 3천210억 달러(약 389조2천억 원)로 지난해보다 33% 이상 급증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런 막대한 에너지 수출은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로 이어져 루블 가치 상승에 기여할 수 있다.

개전 초기 폭락했던 루블화 가치 반등은 서방의 제재가 기대만큼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으로도 해석된다.

셸 등 주요 석유회사들이 '상표 갈이' 방식으로 여전히 러시아산 원유를 유통하고 있는 데다 중국과 인도 등은 서방의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과 화상회의 하는 모디 인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바이든 미 대통령과 화상회의 하는 모디 인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제재에 동참한다며 러시아 사업 철수를 선언한 서방 기업 중 일부가 이런저런 논리를 내세우며 여전히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것도 제재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이 일부 '생활필수품'을 제외하고 러시아에서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생필품으로 보기 어려운 상품들이 여전히 팔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레이의 감자칩, 질레트의 면도기, 에어윅의 실내용 방향제 등이 대표적이다. 레이와 질레트, 에어윅은 각 분야 세계 선두권을 달리는 기업들이라고 WSJ는 전했다.

유니레버와 P&G 같은 생활용품 업체들도 러시아에서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기저귀, 우유 같은 품목이 러시아인의 일용품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미 미시간대 파올로 파스콰리엘로 재무학 교수는 WSJ에 "막연한 제재에 직면한 기업들이 러시아 파트너들과의 사업 관계 유지의 이익과 사업 지속에 따른 평판 손상 사이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의학적으로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제품에 '필수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결국 그들이 겪을 평판 손상을 줄여보려는 시도라고 꼬집었다.

최근 네슬레와 펩시의 일부 직원은 회사가 러시아에서 사업을 계속하는 것에 반발해 자진 퇴사하기도 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passi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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