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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서울을 품 안 가득히…한양도성 길 남산 구간

송고시간2022-05-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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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백악, 인왕, 남산, 낙산 구간으로 나뉜다.

총 18.6㎞인 한양도성 길은 4개 구간의 걷는 맛이 각각 다르다.

서울을 상징하는 곳 중 하나인 남산 구간 길의 특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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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맥문동이 아름다운 서울타워 아래 성곽길[사진/조보희 기자]

소나무와 맥문동이 아름다운 서울타워 아래 성곽길[사진/조보희 기자]

(서울=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백악, 인왕, 남산, 낙산 구간으로 나뉜다. 총 18.6㎞인 한양도성 길은 4개 구간의 걷는 맛이 각각 다르다. 백악과 인왕 구간은 백악산(북악산)과 인왕산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다. 특히 백악 구간에서는 길고 역동적으로 뻗은 한양도성을 감상하기 좋다. 백악산과 인왕산을 오르다 보면 삭막한 도심 가까이 이런 곳이 있었나 하고 감탄할 만한 풍광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이매진은 백악, 인왕 구간을 탐방한 바 있다.

◇ 서울의 박동을 느끼다

진달래, 개나리, 매화, 벚꽃이 만발한 봄날 남산 구간을 걸었다. 서울을 상징하는 곳 중 하나인 남산 구간 길의 특징은 무엇일까. 서울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남산 길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서울 중심부를 손에 잡을 듯 가깝게 볼 수 있는 곳이 남산이었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빽빽한 빌딩과 아파트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숨소리와 박동이 들리는 듯하다. 웅장한 백악·인왕·북한산조차 팽창하는 서울의 기세에 눌리는 듯싶다. 6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한양도성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잠두봉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풍경[사진/조보희 기자]

잠두봉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풍경[사진/조보희 기자]

남산 정상에는 서울의 중심점이 있다. 서울의 경계가 바뀌면 중심도 조금씩 바뀐다. 가령 1896년 중심점은 인사동 194-4번지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서울이다. 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에 한국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남산 구간은 광희문에서 시작해 장충체육관∼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목멱산봉수대터∼한양도성유적전시관∼백범광장∼숭례문으로 이어진다. 남산 정상을 거치는 이 길의 거리는 5.4㎞이다.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주택가를 지난다. 번잡스럽지 않고 조용한 동네여서 도성 옆길을 걷는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광희문은 숭례문과 흥인문 사이에 건축된 소문(小門)이다.

◇ 민초의 애환

한양도성은 도심부를 둘러싼 네 개의 산인 백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평지, 산지, 구릉지를 연결해 지었다. 이 4개의 산을 내사산이라고 부른다. 도성에는 대문 4개, 소문 4개가 설치됐다. 대문은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다. 소문은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이며 대문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광희문은 도성 동쪽 밖으로 드나들던 백성들이 사용했다.

광희문[사진/조보희 기자]

광희문[사진/조보희 기자]

광희문은 민초들의 삶과 가깝게 닿아 있었다. 도성 내 백성들의 시신이 성 밖으로 나가는 출구였기 때문에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조 때는 현재의 노숙인 시설과 비슷한 활인서가 광희문 밖에 설치됐고, 이를 계기로 광희문 밖에는 큰 공동묘지가 생겨났다. 1820년대 창궐한 콜레라, 1866년 병인박해 때 희생된 이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으로 옮겨졌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때 제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남대문 전투'에서 숨진 제국 병사 시신도 광희문 밖에 묻혔다. 이런 사연들로 해서 광희문 길은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한 많은 아리랑고갯길로 불렸다.

힘없는 백성들만 광희문으로 드나든 것은 아니다. 장희빈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나갔고, 인조 때 난을 일으킨 이괄이 이곳을 통해 도망쳤다. 인조도 병자호란 때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나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도성 성곽도 조선 백성들의 피와 땀을 증언한다. 성돌 중에는 축성 공사 담당자의 이름, 벼슬, 공사 일자 등을 새긴 돌이 있다.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각자성석은 조선판 공사 실명제의 산물이었다.

담당자의 이름을 밝혀서 공사 책임을 지도록 하고 뒷날 공사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보수까지 맡겼다. 남산 구간 성곽에는 '안이토리'라는 이름이 새겨진 각자성석이 두 개나 있다.

금위영 석수였던 안이토리는 숙종 35년과 36년에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숙종 37년 승정원일기에는 안이토리가 돌에 깔려 중상을 입고 회복하지 못해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양도성은 1396년 처음 지어졌을 때 팔도 백성 20만 명가량이 동원돼 98일 만에 완공됐다.

성돌 중에는 축성 공사 담당자의 이름, 벼슬, 공사 일자 등을 새긴 각자성석이 있다.[사진/조보희 기자]

성돌 중에는 축성 공사 담당자의 이름, 벼슬, 공사 일자 등을 새긴 각자성석이 있다.[사진/조보희 기자]

◇ 수도 버리고 도망간 왕들…반면교사로 세운 북한산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들어섰다. 두 나라가 국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아 전쟁이 지구촌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전쟁으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다.

전쟁이 유가,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을 상승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각국의 긴축으로 이어지면서 경제 성장을 둔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양도성은 수도 방위를 위해 축성됐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때 선조와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신의주, 강화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국민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러-우크라 전쟁은 실감하게 한다. 군주가 수도를 지키지 못한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숙종은 한양도성에 더해 북한산성을 축조했다.

도성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킬 든든한 안보 울타리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산성 건설을 반대하던 신하들과 36년 동안 논쟁을 벌이다 재위 37년(1711)에 12.7㎞의 북한산성을 완성했다. 해외 도피 제안을 거부하고 수도 사수를 천명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결의는 수도 방어와 항전을 다짐했던 숙종의 강력했던 의지를 소환한다.

한양도성 해설 자원봉사가인 권혁준 한국청년연합(KYC) 도성길라잡이는 한양도성의 가치는 관광 자원에 머물지 않는다며 도성이 담고 있는 국토방위의 가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북한산에는 삼국시대 처음 산성이 축조됐으며 고려 시대에도 이곳은 전략적으로 중시됐다.

현재 북한산성은 성곽 여장이 무너졌으나 성체는 대부분 보존돼 있다. 여장은 성채 위에 쌓은 낮은 담을 말한다. 북한산성에는 성곽, 능선, 사찰 등을 따라 걷는 탐방로가 다양하게 조성돼 있다. 이들 탐방로는 주말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태조 때 급경사 구간에 축조한 계단식 성곽[사진/조보희 기자]

태조 때 급경사 구간에 축조한 계단식 성곽[사진/조보희 기자]

◇ 서울의 역사가 압축된 공간

반만년 연륜의 한반도에 과거의 흔적이 없는 곳 없지만, 남산 구간은 특히 역사가 압축된 공간이다. 조선, 일제 강점기, 현대의 발자취가 곳곳에 있다. 장충단공원 자리에 있던 장충단은 1900년 건립된 최초의 국립 현충 시설이었으나 일제가 없앴다. 지금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 비문을 썼던 장충단비만 남아 있다.

장충체육관은 1963년 국내 최초로 건설된 돔 양식 실내 경기장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살았던 필리핀이 지어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장충체육관은 순수 한국 자본과 기술력으로 건설됐다.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프로레슬링 경기,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의 경기가 치러진 장소이기도 하다. 남산 길에서 마주치는 한국자유총연맹의 전신인 자유센터는 한때 반공의 보루였다.
1950년 창설된 국립극장은 전통 공연예술을 동시대적 예술로 승화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한국 전통 공연예술을 새롭게 창조해 세계에 내놓는다. 남산과 함께 숨 쉬는 국립극장의 입지는 자연을 닮은 한국인의 예술적 심성을 담아내기에 좋을 듯하다.

남산 정상에 있는 서울의 중심점[사진/조보희 기자]

남산 정상에 있는 서울의 중심점[사진/조보희 기자]

남산 꼭대기에는 기우제, 기청제 등을 지내던 국사당이 있었으나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을 때 헐렸다. 사당을 구성했던 건축물의 일부가 인왕상으로 옮겨져 국사당이라는 이름의 사당이 다시 생겼다. 그러나 이곳은 국가 제의를 지내는 곳이 아니며 개인 소유이다.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일제는 1945년 패망 후 직접 조선신궁을 해체, 철거했다. 신궁 터에는 이후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 혁명 후 철거됐다.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남산교육연구정보원 느티나무 옆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졌다.

조선은 남산에 봉수대 5곳을 설치했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중앙봉수대였다. 전신, 전화 도입 이후 봉수제는 폐지됐다. 서울시는 3 봉수대 자리에 봉수대를 복원하고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남산 자락 광장에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 있다. 이는 2013~2014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는 야외 시설이다. 맨 위쪽인 지표에는 조선신궁 배전 터가 일부 복원돼 있고, 그 밑으로 한양 도성 성벽이 발굴돼 있다. 일제가 도성 성벽 위에 참배 시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시관은 도성 축성의 역사, 일제 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보여준다.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사진/조보희 기자]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사진/조보희 기자]

발굴 전시된 도성 유적은 189m이다. 태조, 세종, 숙종 등의 제위 시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 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남산구간은 숭례문에서 끝난다. 숭례문과 한양도성은 조선 시대 지방에서 상경한 백성들에게 더할 수 없이 반가운 랜드마크였다. 길고 고된 여정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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