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그린 추상…안드레아스 거스키가 기록한 현대문명
송고시간2022-03-29 16:33
아모레퍼시픽미술관서 국내 첫 개인전…최초 공개 신작 2점 등 40점 전시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강렬한 붉은색 띠가 화면 위쪽을 가로지른다. 그 아래 대부분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작품 전체가 수평 띠로 구성됐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를 연상케 하지만, 그림이 아닌 사진이다. 수백만 송이 튤립으로 가득 찬 들판을 헬리콥터에서 여러 장 촬영해 원근감 없이 이어붙였다.
거대한 기하학적 추상화처럼 보이는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실제 대상을 찍은 사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작지만 분명하게 튤립 하나하나의 형상이 나타난다.
독일 출신 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67)는 현대사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는 거장이다. 현대 문명과 인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사진의 확장적 가능성을 실험해온 그는 촬영한 이미지를 조합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회화적 사진으로 유명하다.
대표작 '라인강 2'가 2011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30만 달러에 낙찰되는 등 세계에서 가장 작품 가격이 비싼 사진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31일 개막하는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은 1980년대 중반 초기작부터 '파리, 몽파르나스'·'99센트' 등 1990년대 작업한 대표작, 이번 전시를 통해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 2점까지 총 40점을 선보인다.
추상회화나 미니멀리즘 조각의 특성을 더한 작업으로 정형화된 사진예술의 틀에서 벗어난 거장의 면모를 접할 기회다.
사진은 현실을 가장 정확히 재현하는 매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1900년께부터 사진작가들은 창조성을 추구했다.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은 더 확대됐고, 거스키는 1992년부터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스캔해 컴퓨터로 편집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세로 2m, 가로 5m의 대작 '파리 몽파르나스'(1993)는 거스키가 디지털 편집을 시작한 시기의 대표작이다. 파리 최대 규모의 아파트 건물을 두 군데 시점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조합하면서 모든 창문 크기가 일정하게 보이도록 연출했다.
수많은 창문이 격자 구조로 자리 잡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집의 가구, 커튼, 화분까지 하나하나 확인된다. 추상미술 같으면서도 극도로 선명한 재현이 공존하는 거스키 작업의 특징이다.
거스키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고층 빌딩, 공장, 아파트, 증권거래소 등의 장소들을 포착해 거대한 사회 속 개인의 존재를 다뤘다.
아마존 물류센터에 빼곡히 들어찬 상품들을 담은 '아마존', 선물거래소에서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로 혼란스러운 '시카고 선물거래소Ⅲ', 북한 평양 아리랑축제의 매스 게임 장면을 촬영한 '평양Ⅵ', 잿빛의 황량한 라인강 풍경으로 기후 위기를 은유한 '라인강Ⅲ' 등 다채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처음 공개되는 '얼음 위를 걷는 사람'(2021)은 라인강 인근 목초지에서 얼음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스트레이프'(2022)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키 코스의 경사를 평면으로 보여준다.
우혜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관장은 "거스키의 작품은 표현 방법과 구성만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중요하다"며 "현대문명이 이룩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거시적인 구조와 함께 디테일도 찬찬히 보길 바란다"며 "큰 관점에서 보는 시각과 별도로 미시적으로는 모든 것이 촘촘히 재현된다는 점이 감상 포인트"라고 덧붙였다. 8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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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2/03/29 16:3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