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눈꽃산행의 '백미' 태백산 천제단 길

"꽃 같은 눈이 친구 어깨 위에 쌓이네"
문수봉[사진/조보희 기자]
문수봉[사진/조보희 기자]

(태백=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세상을 점묘하며 내리는 눈송이, 차고 깨끗한 바람, 적요의 시간. 겨울이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이다. 태백산 천제단 길은 겨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태백산은 덕유산, 한라산과 함께 손꼽히는 눈꽃 산행지다.

천제단은 고조선, 신라 등 고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다. 하얀 눈이 소담스레 내려앉은 겨울의 절정에 천제단 길은 새해 각오를 다지고, 행운을 기원하는 탐방객들로 붐볐다.

'설화비만수전의'(雪花飛滿水田衣). 백거이와 교유했던 당나라 시인 웅유등(熊孺登)의 칠언절구 시 '송승유산'(送僧游山)의 마지막 구절이다. '꽃 같은 눈송이가 가사 위에 수북하네'라는 뜻이다. 진리를 찾아 구름처럼 산속을 떠돌던 스님이 해 질 녘 자신의 가사(袈裟) 위에 꽃처럼 쌓인 하얀 눈을 보고 아름다운 영적 체험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제단 지나 '태백'이란 이름이 유래된 문수봉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서설이 내렸다. 길을 안내해준 안주봉 태백산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가 짊어진 무거운 배낭 위에 내려앉은 백설이 '가사 위의 꽃'을 떠올렸다. 오래되고 얼룩진 배낭 안에는 따뜻한 물, 구급약 등 탐방 중에 우리 일행과 등산객들에게 필요할지 모를 긴급 구난품이 들어 있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의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쓸쓸함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것과 대동소이할 것 같다. 대지와 나뭇가지뿐 아니라 친구의 어깨 위에 쌓이는 꽃 같은 눈을 발견할 수 있는 눈꽃 산행은 산인의 '로망'이지 싶다.

문수봉에서 본 천제단. 오른쪽에 장군단, 왼쪽에 천왕단, 오른쪽 아래 망경사가 보인다. [사진/조보희 기자]
문수봉에서 본 천제단. 오른쪽에 장군단, 왼쪽에 천왕단, 오른쪽 아래 망경사가 보인다. [사진/조보희 기자]

봄, 여름, 가을 산은 아름답다. 겨울 산은 통상의 미학과는 다른 매력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무들이 마지막 잎새까지 떨어뜨린 겨울 산은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누런 흙과 하얀 바위 근육을. 겨울 산이 매혹적인 것은 그 고독과 장엄이 우리가 닮고 싶어 하는 무엇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은 혹한을 이기는 나목과 새봄을 준비하는 겨울 산과 닮았다.

사물과 현상, 사건의 본질을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하는 데 30여 년을 바친 조보희 기자는 신이 전정한 듯 나목들이 가지런한 겨울 산의 능선을 바라보다 "자연의 질서는 인간의 질서보다 정연하다"고 외쳤다.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과 천제단으로 올라갈수록 백두대간의 장관은 넓게 펼쳐졌다. 북쪽으로 한국에서 7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함백산(1,572m)이 솟구쳤고, 서쪽으로 영월이, 서남쪽으로 소백산맥이 길게 누었다.

남쪽 부쇠봉 너머는 경상북도다.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백두대간이었다. 하얀 눈밭 위에 푸른 주목과 분비나무가 줄지어 선 백두대간은 흡사 엎드린 호랑이의 등뼈 같았다.

영봉의 천왕단과 태백산 표지석[사진/조보희 기자]
영봉의 천왕단과 태백산 표지석[사진/조보희 기자]

◇ 유일하게 산꼭대기에 설치된 큰 제단, 천제단

천제단은 태백산 정상에는 큰 제단이다. 산꼭대기에 설치된 대규모 제단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천제단은 영봉(1,561m)의 천왕단, 장군봉(1,567m)의 장군단, 그 아래의 하단 등 세 기의 제단으로 구성된다.

중심 제단인 천왕단에는 단군왕검을 뜻하는 '한배검'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단군조선부터, 삼한, 신라, 고려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으니 태백산은 민족의 영산이 아닐 수 없다.

태백산국립공원 탐방로 5개 중 유일사 코스는 유일사주차장∼ 유일사∼장군봉∼천제단∼당골광장으로 이어지며 약 7.5㎞이다. 난이도는 '중', 4시간 정도 걸린다. 우리는 천제단에서 당골광장으로 곧장 내려오지 않고 망경사와 용정, 문수봉을 거친 뒤 당골광장으로 하산했다. 약 13㎞를 걸었고, 5시간 반 정도 걸렸다.

주차장에서 천제단까지 거리는 약 3.5㎞다. 제법 가파르지만, 산행 초보자도 도전해볼 만하다. 유일사는 백두대간에 자리 잡은 하나뿐인 비구니 사찰이다. 새해가 밝자마자 천제단을 찾은 탐방객들의 얼굴은 환했다.

탐방로에서 주목 고사목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탐방로에서 주목 고사목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정치적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 살아간 모습이 진정한 역사라면 상고시대부터 계속되는 천제단 방문이야말로 한민족의 살아있는 역사의 일부를 구성할 것이다. 천제단을 찾는 민초들의 간절한 바람만큼 확실한 시대의 요구가 있을까.

천제단이 표상하는 기복신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겠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한국 사회에서의 행복의 자리'라는 글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홍콩, 중국, 대만 국민보다 더 생존적 가치에 매달리고, 현세주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식민지배, 분단, 전쟁이 불러온 궁핍과 참혹의 트라우마에 기인한 것이리라.

한국인은 개선된 생활 여건 아래서도 행복의 샘을 다원화하지 못해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경제력에 걸맞은 행복을 향유하지 못하는 한국인이다. '돈'으로 대표되는 생존적 가치 외에 사랑, 우정, 예술, 문화, 학문, 배려, 헌신, 여행, 취미, 운동 등 행복의 원천을 다양화해야겠다. 새 대통령을 뽑는 임인년이 사람의 행복을 우선하는 역사의 원년이 되면 좋겠다.

눈 위에 새들이 따먹은 마가목 열매껍질이 떨어져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눈 위에 새들이 따먹은 마가목 열매껍질이 떨어져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천제단에서 문수봉으로 가다 보면 넓은 주목 군락지가 내려다보인다. 수백 년은 됐을 법한 푸른 주목들과 하얗게 고사한 주목들이 눈밭 위에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신령스럽다.

주목은 해발 700m 이상 고지에서 자라는 키 큰 상록침엽교목이다. 태백산은 국내에서 가장 큰 주목 군락지이다. 2천800여 그루의 주목이 자란다. 가장 큰 주목은 지름 1.44m, 수령 500년 이상 된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도 주목이다. 정선 두위봉에 있는 이 주목은 수령이 1천400여 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이다.

주목은 나이가 들수록 속이 비어간다. [사진/조보희 기자]
주목은 나이가 들수록 속이 비어간다. [사진/조보희 기자]

주목은 오래 살 뿐 아니라 죽어서도 넘어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굳건히 서서 버틴다. 뿌리가 깊고 튼튼한 데다 나무질이 단단하고 병충해에 강해 고사목이 되어서도 쉽게 썩지 않기 때문이다. 주목을 두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주목이 늘어선 탐방로 중간중간에 빨간 마가목 열매껍질이 흰 눈밭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새들이 알맹이를 까먹고 버린 것들이다. 딱따구리가 나무 기둥에 파놓은 꽤 큰 구멍도 눈에 띄었다. 겨울에도 여전히 생동하는 자연은 감동의 원천이다.

◇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과 절집

천제단과 문수봉 사이에 있는 망경사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찰이다. 망경사에는 탐방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분은 망경사 스님이다.

우리는 돈이 매개되든 아니든 타인의 노동에 의지해 산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일갈했지만, 타인은 내가 딛고 선 어깨이기도 하다. 분업화가 심화하고 네트워크가 촘촘해지는 요즘 타인 의존성은 더 깊어지고 있다.

망경사 입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이자 맛있는 물로 유명한 용정이 있다. 용이 하늘로 오른 자리에서 물이 솟아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태백시가 천제단에서 지내는 천제의 제수로 이 물을 사용하고 있다.

문수봉 정상의 편마암 무더기[사진/조보희 기자]
문수봉 정상의 편마암 무더기[사진/조보희 기자]

◇ '태백'의 유래 문수봉

태백산 주요 봉우리 중 하나인 문수봉(1,517m) 정상에는 밝은 빛깔의 편마암 무더기가 널려 있다. 이 돌무더기 때문에 문수봉 정상은 멀리서도 하얗게 빛난다. '매우 밝다'는 뜻의 '태백'이라는 이름은 문수봉에서 유래했다.

태백산은 육산(肉山. 흙산)으로, 바위와 돌이 많지 않으나 문수봉은 일대에서 보기 드문 돌산이다. 정상 부근에는 탐방객들이 쌓아 올린 돌탑이 여럿 있었다.

문수봉에서는 멀리 있는 장군봉과 영봉, 천왕단이 뚜렷이 보인다. 천제단에서 당골계곡으로 바로 내려가는 탐방객이 대부분이지만 문수봉의 신비로운 돌무더기 정상을 직접 보지 않고는 천제단 길을 온전히 즐겼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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