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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청산리 대첩' 김좌진 장군 스러지다

송고시간2022-01-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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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 24일 청산리 대첩을 거둔 김좌진 장군이 순국했습니다.

사단법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해 이웃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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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1930년 1월 24일 청산리 대첩을 거둔 김좌진 장군이 순국했습니다.

사단법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해 이웃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16세 나이에 자기 집 노비 30여명을 해방하고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80칸이나 되는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자신은 초가에 나가 산 일입니다.

그는 어릴 때 서당공부를 하고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다녔을 뿐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문무를 겸비해 19세에 한성신보라는 신문사 이사가 된 데 이어 애국계몽단체 서북학회 교육기관인 오성학교의 교감을 맡았습니다.

이후 김좌진은 당시 기울고 있던 나라를 교육이나 언론이 아니라 무력으로 구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키로 결심합니다. 이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1911~1913)의 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뜻한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북간도로 건너간 것입니다.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군정부의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이 됐습니다.

김좌진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겠다는 숙원사업에 마침내 착수하게 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라는 이름을 북로군정서로 바꾸어 총사령관이 되고 임시정부가 지원해준 자금 1만원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 스스로 교장이 됐던 것입니다.

1920년 9월 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한 데 이어 독립군을 쫓던 일본군과 두만강상류 청산리에서 같은해 10월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홍범도 장군과 연합해 일본군 1천200여명을 사살하는 세계 전쟁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올렸다고 기념사업회는 전하고 있습니다.

김 장군은 이후 약소민족 독립을 원조한다는 당시 소련 정부의 선전에 북간도를 떠나 시베리아 땅으로 갔다가 뜻한 바 있어 간도로 되돌아왔습니다.

이후 교포사회 통합 활동도 전개했으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조종을 받은 사람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당시 41세였습니다.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유창엽 기자 김지효 크리에이터

yct94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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