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인생에 한 번쯤 '반가사유상'과 무언의 대화를
송고시간2022-02-23 08:01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전시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생각하기 시작할 때 피어난 미소일까, 생각이 끝났을 때일까?" 한 관람객이 동반자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상설 전시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이처럼 우리에게 생각의 화두를 던져준다. 전시공간인 '사유의 방'은 1천 4백여 년 세월을 견뎌 온 반가사유상을 보는 것만으로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든다.
◇ '반가사유상'만을 위한 생각의 공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만날 수 있는 근사한 곳이 생겼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사유의 방'을 2021년 11월 개관했다. 일반에 공개된 지 두 달여 만에 11만 5천여 명이 다녀간 박물관의 핫플레이스이다.
'사유의 방'은 온전히 반가사유상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에 제작된 높이 81.5cm의 금동반가사유상과 7세기 전반에 만든 높이 90.8cm의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소극장 규모로 439㎡ 크기다. 최욱 건축가가 디자인했다.
금동 색의 '사유의 방'과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글귀가 새겨진 입구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서면 먼저 캄캄하고 긴 복도를 걷게 된다. 한 열 걸음 걸으면, 커다란 스크린에 흑백영화처럼 새하얀 연기가 바람에 어지러이 날린다. 장 줄리앙 푸스의 디지털비디오 작품 '순환'이다. 끝없는 물질의 순환과 우주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가사유상을 마주하기 전 잠시 생각을 가다듬게 한다. 또 열 걸음을 걸어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모퉁이를 돌면 토굴처럼 어둡고 텅 빈 듯한 전시실이 나온다.
◇아득히 멀어보이는 두 반가사유상 사이 거리
아득히 먼 곳처럼 여겨지는 곳에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앉아 있다. 처음엔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검은 공간만을 마주한다. 그러다 성급히 반가사유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사유상을 음미하듯 다가가는 사람,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반가사유상의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뒤섞인다. 전시실 끝에서 사유상까지 거리가 사십 보가 넘는다.
계피 향을 섞은 황토로 벽을 만들었다. 벽과 바닥은 조금 기울어져 있지만, 설명을 듣지 않는다면 알아채기 힘들다. 조명을 최소화해 어둡다. 두 반가사유상 바로 위에는 20개씩 모두 40개의 작은 조명이 원 두 개를 그리며 사유상을 비춘다. 커다란 천장에는 조명 대신 알루미늄 봉 2만여 개가 박혀있다. 알루미늄 봉 끝은 1천 4백여 광년을 날아 온 별빛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타원형 받침대 위에 두 사유상이 나란히 있다. 받침대 주변으로 둥글게 설치된 테두리만 사유상과 관람객 간 거리를 유지해 준다. 몸을 기울이면 손이 닿을 듯한 거리다. 유리 진열장도 없다. 타원형 받침대 주변을 스물다섯 보가량 걸어 돌면 두 사유상의 앞, 옆, 뒤를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나 바티칸 성베드로성당에서 '피에타'를 본 경험이 있는 관람객이라면 지금 사유의 방에서 반가사유상을 만나는 게 엄청난 행운임을 느낀다.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다. 다만 플래시 기능과 삼각대는 사용할 수 없다. 관람객들은 연신 스마트폰으로 반가사유상을 찍는다. 너무 어둡다 보니 최신 스마트폰의 HDR 기능을 사용해도 천장 알루미늄 봉 끝의 빛까지 담기는 힘들다. 저감도에 30초 이상 장노출, 조리개는 11보다 깊게 촬영한 뒤에 어두운 천장 부분만 노출보정 작업을 해야 천장 빛을 살릴 수 있다. 관객들은 반가사유상에서 두어 걸음 물러나 바닥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촬영하면 가능하다. 바닥에 엎드려 찍지는 말자.
◇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시간을 잊게 한다
"'사유(思惟)'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를 나타낸다"고 사유의 방 설명서는 말한다. 반가사유상처럼 그런 깊은 사유에 잠길 수는 없겠지만 멍하니 생각을 비우기도 좋은 곳이 사유의 방이다. 사유의 방에서는 무릎에 팔을 괸 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생각 잠긴 반가사유상의 자세뿐 아니라 엷은 미소를 짓는 표정까지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사유상의 미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실제로 두 시간 정도 반가사유상을 감상하다가 약속 시간에 늦어 서둘러 전시실을 나선 한 여승이 말했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잊었다."
전시실 왼쪽의 반가사유상은 날카로운 콧대와 또렷한 눈매,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정제된 옷 주름 등이 특징이다. 오른쪽 반가사유상은 민머리에 단순한 보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등보다 단순하고 절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문화재청의 지정문화재 번호 폐지에 따라 국보 제78호와 제83호라는 호칭을 없앤 대신 애칭을 찾고 있다. 지난해 9월까지 두 사유상의 애칭을 공모했으나 대상 수상작을 뽑지 못했다.
사유의 방에 머무는 시간은 '당신이 사유하는 시간만큼'이다. 개관 한 달 보름여 만인데 "벌써 10번을 왔다"는 관람객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무료인 만큼 사유의 방 입장료도 무료다. 어둡고 컴컴한 방인 탓일까. 엄마를 따라온 어린 관람객이 "여기 재미없어"라고 말했다. 저 아이도 먼 훗날 마음이 허하고 머리가 상념으로 복잡한 날 '사유의 방'을 다시 찾지 않을까?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zji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2/02/23 08:01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