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시대] ② 신고하고 송사 걸면 해결될까…'역효과 클 수 있다'
송고시간2021-12-25 08:00
'갈 데까지 가자는 건가?'…신고한 이웃에 보복심리 유발 우려
"소송은 최후수단이며 상처는 남아"…분쟁조정 거치는 방법도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 사는 A씨는 지난해 층간소음 때문에 노이로제를 겪었다. 코로나19 사태로 두 아이가 학교와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고 종일 집에 있어야 했는데, 아래층 주민으로부터 "시끄럽다"는 항의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수시로 천장을 '쿵쿵' 치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 날에는 인터폰으로 전화가 와 협박성 발언까지 듣게 됐다.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행여 뉴스에 나오는 사건처럼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두려웠던 A씨는 경찰에 협박 피해를 신고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돌아온 것은 아래층 주민의 '맞신고'였다. A씨의 집에 경찰이 찾아오는 일이 벌어지더니, 나중에는 "아동학대가 의심된다"는 신고를 받고 또 경찰이 찾아오기도 했다. 아이들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데 아동학대로 신고됐다는 말에 A씨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A씨는 "우리 딴에는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아래층에 전화도 몇 차례 하고, 바닥에 매트도 까는 등 나름대로 조심하던 중이었는데 우리가 소음을 냈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경찰을 불렀다니 '이 사람이 갈 데까지 가는구나' 싶었다"며 "'정말 끝장을 봐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아래층 주민과 여러 차례 만나고 통화하는 과정을 거쳐 갈등은 다소 잦아들었지만 이웃 간 골은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A씨는 "그런 과정을 거친 뒤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이 생활이 너무 불편하고, 빨리 집을 옮겨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 신고하고 소송 걸고…"문제 해결엔 오히려 역효과"
층간소음으로 이웃 간 갈등을 겪는 이들의 흔한 선택지 중 하나는 경찰 신고다. 소음을 계기로 한 말다툼 과정에서 실제로 폭행 등이 발생해 명백히 경찰의 개입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경찰의 존재감을 빌려 상대방에게 경고나 위협을 가할 목적으로 신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수단이 당장의 상황을 넘기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관계 회복을 통한 층간소음 갈등 해결이라는 근본적 해법에 접근하기는커녕 역효과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외부 신고기관의 개입이 되레 당사자들 사이에 골을 더 깊이 파고 보복심리를 유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구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경찰관은 "층간소음으로 경찰이 출동하면 신고당한 사람은 '이런 걸로 나를 처벌하려고 해?'라는 심리를 갖게 된다"며 "당장은 기가 죽을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나고 그날 일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자신을 신고한 이웃에게 적대감을 갖기 쉽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같은 갈등 상황에서 '인과응보'를 중요시하는 국민 정서도 만만치 않아 민·형사소송이 층간소음 대응 수단 중 하나로 종종 거론되곤 한다.
일부 법학계 등에서는 소음도 인간의 신체에 고통을 주는 '유형력'의 한 종류에 해당한다며 층간소음 유발자에게 형법상 폭행이나 상해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2009년 대법원은 구청에 확성기가 설치된 차를 타고 들어가 장시간 시위 방송을 한 피고인들의 공무집행방해 혐의 사건에서 "합리적 범위를 넘어 상대방에게 고통을 줄 의도로 음향을 이용했다면 이를 폭행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놨다.
법조계에서는 층간소음도 폭행으로 볼 여지는 있지만 '고의성' 유무가 관건이라고 해석한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일부러 바닥에 발을 쿵쿵 찧는다거나 우퍼를 설치해 지속적으로 트는 등 행위는 상대방을 괴롭히겠다는 고의가 명백해 폭행으로 인정될 수 있다"면서도 "고의가 아니라 단순히 주의하지 않아 발생하는 생활 소음으로는 폭행이나 상해죄 입증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층간소음을 이같이 처벌할 수 있다고 해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개인 간 갈등에 형사처벌이라는 형태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논란이 생길 수 있다.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만 '범죄자 양산'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층간소음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데다 증거 확보도 쉽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상처만 남아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은 "고의로 소음을 내는 위층을 상대로 아래층 주민이 민사소송을 걸어 승소해 배상금을 받았지만 불과 1년 후 이사를 나간 사례가 있다"며 "너무 견디기 힘들다면 소송이 최후의 수단은 될 수 있어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엄청난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 기관 통해 중재·조정 거칠 수도…"자체적 해결이 중요"
층간소음이 법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양측 갈등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런 단계에 이르기 전 제도적 틀 속에서 선택 가능한 수단이 소송만 있는 것은 아니다. 층간소음 담당 기관 상담이나 소음 측정, 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 시도 등도 가능하다.
대표적 기관으로 한국환경공단 산하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가 있다. 층간소음 관련 전화·방문 상담과 세대 간 중재, 소음 측정 서비스 등을 제공해 갈등 해결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운영된다. 층간소음 담당 기관 중 가장 인지도가 높고 접수하는 상담 건수도 연 수만건에 달한다.
다만 업무량에 비해 인력이 부족하다. 서울지역 전담 상담기관으로 지정된 환경보전협회 소속 13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전화상담과 현장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45명에 불과하다. 복수의 세대가 관련된 사안이다 보니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어도 한쪽에서 협조하지 않으면 한없이 늦어지기도 한다.
층간소음 가해자로 몰렸던 A씨는 "이웃사이센터에 민원을 냈는데 코로나 때문에 민원이 크게 늘었다고 해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소음을 듣는 쪽인 아래층에서 동의해야 측정이 가능한데 '무슨 소용이 있냐'며 동의하지 않아 일이 진행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운영하는 중앙 공동주택관리 분쟁조정위원회가 있고, 광역시·도 단위별로도 지방 분쟁조정위가 설치돼 층간소음 관련 중재 업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층간소음 갈등에 가장 신속하게 대응하려면 공동체 단위의 문제 해결이 선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 견해다.
한국환경공단 관계자는 "근본적으로는 층간소음을 줄이도록 건물을 잘 지어야 하고, 이웃사이센터까지 오기 전 공동주택 자체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공동주택관리법에 명시된 아파트 층간소음관리위원회 구성을 의무조항으로 두는 것도 신속한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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