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별이 된 '동양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 그리고 천안

(천안=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류가 다시 세계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휩쓸고 있다. K팝, 영화 등에 이어 이번엔 웹드라마를 앞세워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몰입하도록 만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담고 있는 메시지도 선명하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얼굴을 오락을 매개로 명료하게 그려낸 한국 문화의 역량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홍대용과학관 내부. 조선 시대 천문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홍대용과학관 내부. 조선 시대 천문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 동아시아의 '코페르니쿠스'

21세기에 동북아 시대가 올까. 한국은 제국주의 시대 피식민 국가 중 선진국으로 올라선 첫 국가이다. 중국은 근대 200여 년을 제외하고, 지난 1천여 년 동안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다. 중국은 반식민지의 굴욕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미국의 유일 강국 지위를 위협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일본은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했다. 한·중·일의 부상은 동북아 시대 도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개항 시기 우리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를 묻지 않고는 한국이 주류 국가로 가는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연구팀은 지난 2001∼2002년 보현산천문대에서 1.8m 광학망원경으로 소행성 2개를 발견했다. 세계 천문학계는 그중 하나에 조선 후기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이름을 헌정했다.

담헌 홍대용은 조선 최초로 사설 천문대를 지었다. 동양의 코페르니쿠스로 불렸던, 북학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지구는 둥글고, 스스로 돈다'는 지구 구형설과 지구 자전설, 우주 무한론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주장했다. 특히 당대 만연했던 중화주의적 명분론도 비판했다.

조선 시대 만든 천문기계 혼천의[사진/조보희 기자]
조선 시대 만든 천문기계 혼천의[사진/조보희 기자]

통치제도, 토지, 군사,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개혁 의제를 내놓고 신분제 철폐를 주장했다. 거문고 연주에 능했고 하프시코드와 비슷한 서양 악기를 모방해 만든 양금(洋琴)을 국내에 소개했다.

그는 철학, 형이상학, 과학, 예술을 넘나든, 요샛말로 '융합적' 사상가였다. 그에게서 우리 근대화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어색하지 않다.

홍대용은 충남 천안시 수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영조 7년인 1731년에 태어나 정조 7년인 1783년 세상을 떠났다. 열두 살에 순수학문 전념을 맹세했을 정도로 학문적 자각이 뛰어났으며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석실서원에서 23년 동안 공부했다. 이 서원에서 호남 실학파인 황윤석, 북학파 박지원 등이 배출됐다.

홍대용은 35세가 되던 1765년, 세계관을 뒤흔드는 경험을 한다. 사신으로 임명된 작은 아버지 홍억을 따라간 중국 베이징 여행이었다.

사비로 천문대인 농수각을 지은 데 이어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제작하고, 서양식 자명종을 만드는 등 과학기술 탐구에 빠져 있던 홍대용에게 서양 과학 문물이 들어와 있던 베이징 여행은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이 여행을 기록한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의 3대 중국 견문록으로 꼽힌다.

홍대용의 여행담과 기록은 당대 지식인 사이에 중국 견문에 대한 동경과 연행 붐을 몰고 왔고, 실용을 중시하는 근대 사상인 북학으로 이어졌다.

연행에서 돌아온 뒤 홍대용은 통천의, 혼상의, 측관의, 구고의, 자격루 원리로 움직이는 수격식 혼상, 혼천시계 등 다양한 천문 기기들을 추가 제작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배격하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홍대용의 저서들. 왼쪽부터 주해수용, 임하경륜, 담헌서, 건정동필담.[사진/조보희 기자]
홍대용의 저서들. 왼쪽부터 주해수용, 임하경륜, 담헌서, 건정동필담.[사진/조보희 기자]

홍대용은 14권 7책으로 된 '담헌서', 경세제민 방안을 제시한 편서인 '임하경륜', 베이징 여행기인 '담헌연기', 수학책인 '주해수용' 등 많은 저서를 썼다.

"지구는 하루 12시간 회전하면서 9만 리 거리의 땅 둘레를 12시간 달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벼락보다 빠르고 포탄보다 신속하다"(의산문답), "지구 세계를 우주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먼지만큼도 안 되며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일밖에 안 된다"(을병연행록),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 한다면 옳은 말이지만 이것이 여러 성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을병연행록) 등은 그의 대표적 어록이다.

◇ 홍대용 '오마주', 천안과학관

농수각이 있었던 그의 생가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안홍대용과학관이 있다. 천안의 대표적 역사 인물인 홍대용의 사상과 연구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대중이 과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체험 위주 천문우주과학관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최근 2년 동안 관람객을 제한한 상황에서 2014년 개관 이후 지금까지 61만여 명이 다녀갔다. 국내 30~40여 과학관 중 규모, 장비, 관람 인원 측면에서 1~2위를 달린다.

이 과학관에는 관측실, 천체투영관, 전시관, 다목적 강당 등이 있다.

주관측실에는 지름 8m 원형 돔 안에 800㎜ 반사망원경이 설치돼 있었다. 육안 관측용으로는 가장 큰 편인 이 망원경으로 밝은 대낮에도 별을 관측할 수 있다. 가을철 낮에 이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면 봄철 별자리가 보인다. 밤에 보이는 별자리의 반대편이 관측되기 때문이다.

홍대용 과학관 보조관측실. 여러 가지 천체관측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홍대용 과학관 보조관측실. 여러 가지 천체관측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보조관측실에는 고정형 망원경 250∼150㎜ 5대, 이동형 망원경 250∼100㎜ 10대가 설치돼 있었다. 슬라이딩 돔을 열고 망원경을 '수성'으로 맞추자 렌즈가 자동으로 수성 방향으로 움직였다. 관람객들은 두 관측실에서 태양 흑점, 달, 행성, 성단, 성운, 은하, 별자리 등을 관측할 수 있다.

좌석 수 99개의 3D 천체투영시설인 천체투영관에는 지름 15m의 거대한 반구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우주와 관련한 다양한 입체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의자 등받이를 젖혀 눕다시피 해서 스크린을 바라보니, 마치 우주 중간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영상이 펼쳐졌다. 빅뱅, 별들의 탄생과 소멸로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이 생겼고, 그 물질로부터 생명이 탄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 동물, 식물은 물론, 심지어 암석과 같은 무생물을 구성하는 물질도 모두 우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물론, 바윗덩어리도 약 140억 년 전의 조상은 같았다는 말이 된다. 무한우주론이나 빅뱅우주론은 현재로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구 자연을 넘어서는, 광대한 우주에 관한 인식과 지식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주말도 아닌 평일, 비가 오는데도 이 과학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질문이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른다.

전시실은 홍대용 주제관, 과학사 전시관, 과학체험관으로 구성되며 주제관에는 홍대용 생애와 사상, 업적 등에 관한 자료와 저서가 전시돼 있다. 체험관에서는 우주 지질, 무중력, 원심력 자전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 인문을 사랑했던 겨레는 과학을 품을 수 있을까

홍대용과학관에서 멀지 않은 독립기념관에 조선 말기의 근대화 노력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다.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불과 8년만인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이 켜졌다. 전깃불 도입은 일본과 중국을 앞섰고 동양에서 처음이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의 발전기 구매 소식을 듣고 에디슨조차 놀랐다고 전해진다. 1896년에는 전화가 개통돼 일본을 긴장시켰다. 한국이 정보통신(IT) 강국이 된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1899년 서울에 전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여객용 전차가 선보인 지 19년 만이었다. 전기, 전화, 전차의 도입은 모두 일본을 앞섰다. 1899년에는 중앙은행도 설치됐다. 일본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독립기념관 전시물인 1900년대 초 서울 종로 거리 사진. 왼쪽에 전차가 보인다. [사진/조보희 기자]
독립기념관 전시물인 1900년대 초 서울 종로 거리 사진. 왼쪽에 전차가 보인다. [사진/조보희 기자]

"천지의 참모습을 알고자 할 때는 뜻으로 탐구하고 이치로 모색해서는 안 된다. 오직 기기를 만들어서 측정하며, 수를 계산해서 추측해야 한다". 홍대용이 쓴 수학책 '주해수용'에는 나오는 글이다.

정밀한 관찰과 실험, 수학적 계산이라는 근대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학문과 도덕, 철학과 형이상학을 숭상한 문명국가였던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과학기술, 그것에 기반한 상공업과 군사력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같은 과학자의 사상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지 못한 결과다. 한때 최대 문명을 이룩했던 동양이 근대에 들어 서구와 달리 과학기술의 가치에 왜 눈뜨지 못했는지, 그 역사·사회적 이유와 배경을 찾아내는 건 학계의 영원한 화두다.

한국은 서구식 근대화에 실패했고, 또 성공했다. 19세기에 실패했으나 20세기에 성공했다. 인문학을 사랑했던 한국이 앞선 기술 문명에 또다시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과학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기술만으로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없는 것도 명백하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지성이 있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이 묘사한 자본주의의 모순에 세계가 공감한다. 자본의 논리에 사람을 얽어매는 신자유주의에서 탈출하는 비상구가 이 게임의 끝에 가면 모습을 드러낼까. 한국적 지성이 제시할 해법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홍대용 생가터[사진/조보희 기자]
홍대용 생가터[사진/조보희 기자]

◇ 교류의 중심, 천안

천안에는 명물이 적지 않다. 천안삼거리, 흥타령, 호두과자가 금방 떠오른다.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장소인 아우내장터도 천안에 있다.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병천순대는 아우내장터가 원산지이다. '아우내'는 '두 개의 개천을 아우른다'는 뜻이며 '병천'은 아우내의 한자 말이다.

천안에서 이름난 인물과 물산이 많이 배출된 것은 천안이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기 때문이지 싶다. 교류와 이동이 활발하면 견문이 넓어지고 더 나은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홍대용이 문화 충격을 받고 개혁 개방 의식을 고취한 것도 여행을 통해서였다. 유관순, 독립운동가 이동녕과 조병옥도 천안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들이다.

1919년 아우내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3천여 민중도 선각자였다. 천안삼거리는 예부터 한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로였다.

삼거리 공원에는 흥타령비, 조선 중기 목조 건물인 영남루 등이 있어 옛 자취를 되새기게 한다. 천안에는 서울과 목포를 잇는 국도 1호선, 경부고속도로, 경부선 철도,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고, 천안-논산 고속국도가 분기한다.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촘촘하다. 예스러운 이미지와 달리 충남도 전체 인구의 약 30%가 몰려 사는, 분주한 곳이 천안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사진/조보희 기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사진/조보희 기자]

◇ 아쉬워라 '아우내장터 순대'

아우내장터는 이제 병천순대거리로 변모해 온종일 손님이 북적이는 순대국밥 식당들이 즐비했다. 60여 년 전 인근에 햄 공장이 들어서면서 야채와 선지를 많이 넣은 순대를 팔기 시작했다.

병천순대는 누린내가 적고 맛이 부드럽다. 7천~8천 원 하는 한 그릇에 순대와 내장이 듬뿍 들어 있어 서민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그만이다.

천안삼거리 공원[사진/조보희 기자]
천안삼거리 공원[사진/조보희 기자]

다만 '아우내장터 순대'라고 했으면 국민적 인지도와 사랑이 더 도타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우내'를 브랜드화하지 않은 게 못내 안타깝다.

병천순대거리에는 호두과자, 꽈배기 가게들도 성업 중이었다. 1934년부터 시작된 학화호두과자, 돌가마 화덕으로 빵을 굽는 뚜쥬르제과, 전국 170여 가맹점을 보유한 '못난이 꽈배기' 등으로 유명해진 천안은 '빵의 도시'를 자처한다. '기대 빵빵' 천안 빵지순례 행사도 열린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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