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500년 동안 보존된 광릉숲길

국립수목원의 '진수' 전나무숲길

(포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꿈과 미래가 있는 민족만이 숲을 가꾼다.(산림헌장 중)

광릉 전나무숲 [사진/전수영 기자]
광릉 전나무숲 [사진/전수영 기자]

◇ 건강은 걸어서 온다

19세기 말 고종은 서양인들이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저렇게 힘든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왜 직접 하느냐'라고 말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할 일화가 전해진다.

건강 관리를 하지 않고는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이 진리처럼 된 요즘 운동을 노동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운동이 쉬운 것은 아니다. 힘에 부치기도 하고 적지 않은 끈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운동 종목 중 일상과 가장 가까운 게 걷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는 걸을 만한 길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나고 있다.

개인적·사회적 스트레스가 커지는 감염병 시대를 맞고 보니 걸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산책로가 주변에 있는 게 적잖이 다행스럽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걷기라고 말한다면 자의적일까. 걷기만큼 대중적인 스포츠는 없지 싶다. 걷기를 좋아하는 건 자연 친화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한국인만큼 산과 물을 좋아하는 민족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는 강과 산이 한국인의 생활 가까이 있기 때문이리라.

문화유적을 답사하거나 도보여행길을 걷다 보면 예부터 한국인은 자연에 인위적인 변형을 가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음을 깨닫는다.

광릉 수목원 내 육림호 [사진/전수영 기자]
광릉 수목원 내 육림호 [사진/전수영 기자]

정원을 기하학적으로 설계한 프랑스나 조형화한 일본과 달리 자연을 차용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한국식 전통 정원에서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

담양 소쇄원이 대표 사례다. 자연을 그대로 두고 즐기는 것의 장점은 그것이 언제 보아도 질리거나 싫증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걷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성향을 반영한 듯 전국 곳곳에 도보여행길이 조성돼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주민의 요구에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게 만드는 지방자치제도 여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도보여행 길이 조성돼 있지 않은 지자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제 한국을 '걷기 천국'이라고 불러도 토를 달기 어려울 것 같다.

견문이 적은 탓일 수 있겠으나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 이렇게 많은 도보여행길이 조성돼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감염병 사태가 완화돼 국가 간 여행이 활성화되면 외국인의 국내 관광 코스에 해변길, 솔밭길 등 한국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도보여행길을 포함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산기슭 둘레길이나 정상을 향한 등산로를 걷다 보면 뉴욕의 센트럴파크니, 런던의 하이드파크니 하는 유명 공원들이 한국의 산에 견줄 바 못 된다고 느낀다. 도시의 공원이 아무리 크다 한들 산이 품은 자연에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주머니란속 전시원. 전 세계적으로 희귀식물인 복주머지란속 식물을 야생화와 함께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전수영 기자]
복주머니란속 전시원. 전 세계적으로 희귀식물인 복주머지란속 식물을 야생화와 함께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전수영 기자]

한반도의 산은 그다지 무섭거나 위험하지 않고 걷기에 마침맞다.

미국에 유학이나 근무하러 간 한국인들이 토로하는 아쉬움 중 하나는 가볍게 등산할 수 있는 산이 가까이 없다는 점이다. 서울 북한산이나 인왕산에 오른 외국인들의 입에서 연신 나오는 '원더풀'(wonderful)은 빈말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걷기를 좋아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걷기가 삶을 은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은 삶의 작은 여정과 같고, 걸으면 인생을 사유하게 된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담는다.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다.

건강은 걸어서 온다. 자동차나 열차를 타고 오지 않는다. 걸으면 지혜가 덤으로 온다. 배우자, 연인, 친구와 함께 걸으면 행복, 사랑, 우정이 함께 온다. 가볍게 걸으면 멀리 간다. 인생도 그러하다.

◇ 553년 보존된 광릉숲길

경기도 포천에 있는 광릉숲도 걷기에 좋다.

광릉숲은 조선 시대 나라에서 사용할 큰 나무를 생산하던 곳이다. 1468년 세조의 능인 광릉이 조성된 뒤 능림으로 지정돼 엄격하게 관리됐다. 덕분에 광릉숲은 553년 동안 훼손되지 않고 보전됐다.

전 세계적으로 온대북부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온대활엽수 성숙림이 됐다.

많은 사랑을 받는 능림은 광릉 외에도 있다. 명성황후 무덤이 있었던 홍릉 수목원은 1922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이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헌인릉은 오리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오리나무는 5리마다 이 나무를 심어 이정표를 세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선정릉은 솔숲이 아름답다.

데크길 옆으로 만개한 수크렁 [사진/전수영기자]
데크길 옆으로 만개한 수크렁 [사진/전수영기자]

광릉숲은 1987년 산림박물관과 온실을 갖춘 광릉수목원으로 됐다가 1997년 국립수목원으로 거듭났다.

중앙에 소리봉(해발 536m), 남쪽에 첨전산(392m), 서쪽에 용암산(479m)을 끼고 있는 광릉숲 가운데 자리 잡은 국립수목원은 1천124㏊로, 전국 수목원 중 가장 크다.

광릉숲 자생식물 940여 종을 비롯해 6천7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서식동물은 곤충 3천900여 종, 조류 180여 종, 포유류 30여 종 등 4천400여 종에 이른다.

이중 참매, 검독수리, 솔부엉이, 팔색조 등 조류 18종, 포유류 1종(하늘다람쥐), 곤충 1종(장수하늘소)이 천연기념물이다.

광릉숲은 국내 임업의 산실이자 산림생물종 연구의 메카이기도 하다.

유네스코는 2010년 산림보고인 광릉숲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선정했다. 생물권보전지역은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보호지역 중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보전과 지속가능한 이용을 조화시키기 위해 지정한다.

광릉숲은 설악산(1982), 제주도(2002), 신안 다도해(2009)에 이어 국내에서 4번째로 선정된 생물권보전지역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인 광릉을 포함하면 광릉숲은 세계적인 생물권인 동시에 문화유산이다.

수목원에는 산림생물종 연구 시설 외에 수생식물원, 어린이 정원, 약용식물원, 전나무숲 등 식물의 용도, 특성에 따라 만든 전문 전시원 24개가 있다.

또 러빙 연리목길, 힐링 전나무숲길, 희귀·약용길, 느티나무·박물관길, 식물진화탐구길, 맛있는 도시락길, 소소한 행복길 등 걷고 싶은 길 7개가 조성돼 있다.

비술나무. 가지가 잘리고 난 상처에서 새어 나온 수액이 흘러내리면서 몸통의 일부가 옅은 갈색으로 변했다.[사진/전수영 기자]
비술나무. 가지가 잘리고 난 상처에서 새어 나온 수액이 흘러내리면서 몸통의 일부가 옅은 갈색으로 변했다.[사진/전수영 기자]

생각만 해도 가슴설레는 전나무숲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광릉 전나무숲은 전북 부안 내소사 전나무숲,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과 함께 3대 전나무숲으로 꼽힌다. 피부병으로 고생했던 세조는 오대산 계곡에서 목욕한 뒤 병이 나았다고 한다.

전나무는 천연 항생제인 피톤치드를 많이 내뿜는다. 전나무의 피톤치드가 세조의 병을 호전시켰는지 모른다. 세조는 진작 전나무를 많이 심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고, 이후 광릉숲에는 전나무가 식목됐다.

지금 산책로가 나 있는 전나무 숲은 월정사의 전나무 종자를 증식해 1927년에 조림했다. 이 숲에는 90년 이상 수령의 전나무들이 약 200m 구간에 우람하게 서 있다. 숲속으로 들어가니 개울 물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무 그늘에 돋아난 크고 작은 갖가지 버섯들은 숲의 풍부한 생태를 말해준다. 이곳 외에도 광릉숲 곳곳에는 듬직한 전나무들이 수호신인 양 서 있다.

수목원 동쪽 경계를 따라 왕복 2차선인 광릉수목원로가 지나간다. 이 가로변에도 오래된 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시민들은 나무 데크가 설치된 인도를 따라 산책한다.

전나무숲길 [사진/전수영 기자]
전나무숲길 [사진/전수영 기자]

김천수 수목원 해설가는 전나무숲길을 중심으로 수목원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길로 안내해줬다. 그러다 보니 전나무숲길 외 나머지 길들도 부분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

전나무숲길 코스는 4.5㎞다. 다른 코스들은 2.5㎞ 내외다. 주제를 정해 특정 길을 따라 걷는다면 생태 공부를 할 수 있고, 발길 닿는 대로 다닌다면 걷는 즐거움이 더 할 것 같다.

수목원을 거닐며 일차적으로 느끼는 것은 꽃과 바람이 주는 기쁨이다. 벌개미취, 마타리, 부처꽃, 수국, 독미나리, 수련, 무궁화 등 다채로운 가을꽃들은 방문객을 행복감에 젖게 했다.

7월부터 10월까지 100일 이상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하는 무궁화는 절정에 이른 양 굳세고 화사했다.

무궁화는 진딧물이 생기면 지저분해 보이지만 장미나 국화보다 병충해가 적다. 1∼2차례 방제하면 진딧물은 거의 소멸한다.

한여름 뙤약볕을 이기고 꽃 피우는 무궁화는 강인한 식물이며 한약재로 쓰인다.

낙엽이 내려앉기 시작한 광릉숲길 [사진/전수영 기자]
낙엽이 내려앉기 시작한 광릉숲길 [사진/전수영 기자]

초가을 바람은 다른 곳보다 선선했고,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적당히 불었다. 원활한 통풍은 이 숲이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게 한 요인 중 하나다.

수목원에는 휴원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최대 8천 명이 입장할 수 있다.

수도권에 나라 인구의 절반가량이 모여 산다. 시민들 가까이 있는 큰 숲은 행운이다.

김천수 해설가의 시 '전나무 숲-오래된 우정-'의 일부다.

파란 하늘 샘 하얗게 핀 목화송이

평화롭고 아늑한 숲속

하루보다 긴 전나무 화판 위에

가을이 바람과 함께 붉은 칠을 한다.

(중략)

누구 하나도 없으면 안 되는

뾰족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사는

아주 오래된 우정이

나무 향 짙게 밴 숲을 걷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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