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곳] 크레센도

음악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크레센도'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사이드가 1999년 구성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티캐스트 제공]
'크레센도'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사이드가 1999년 구성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티캐스트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음악으로 사람들의 증오를 풀 수 있을까. 만약 그게 쉽게 가능한 일이라면 이 세상에서 전쟁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렵지만 할 수 있다고, 불가능해 보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유대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태생의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는 1999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과 아랍 출신의 젊은 음악도들을 섞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음악을 통해 평화로 가는 작은 길을 열겠다는 뜻이었다. 서동시집은 괴테가 동서 문명의 화합을 염원하며 지은 12권의 시 작품집 이름이다.

이들은 2005년 화약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2011년엔 한국의 임진각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려줬다.

오케스트라는 성공적이었다. 이들의 연주가 마음속 장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영화 속 세계적인 지휘자 에두아르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젊은 음악도를 절반씩 섞어 평화를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든다. [티캐스트 제공]
영화 속 세계적인 지휘자 에두아르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젊은 음악도를 절반씩 섞어 평화를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든다. [티캐스트 제공]

그로부터 10년 뒤. 이스라엘은 마치 '운명'은 이런 것이라는 듯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공습했다. '합창' 교향곡이 무색하게 남북 관계도 얼어붙었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결국 실패한 걸까.

◇ 실화보다 실제에 가까운 영화

이스라엘 텔아비브 출신의 드로 자하비 감독은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크레센도'(Crescendo)를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에두아르트는 오디션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선발한다.

실력은 이스라엘 연주자들이 월등했지만, 수적 균형을 맞췄다. 불공정 논란이 불거졌다. 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을 연상케 한다.

가까스로 봉합했지만, 문제는 오히려 오케스트라 구성 이후였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연주를 듣지 않았다. 긴장과 갈등은 폭발했다.

지휘자는 화합을 위해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마련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적의는 '조화로운' 연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에두아르트는 실력이 뛰어난 이스라엘 남성 바이올리니스트 대신 팔레스타인 출신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리더의 권한을 준다. [티캐스트 제공]
에두아르트는 실력이 뛰어난 이스라엘 남성 바이올리니스트 대신 팔레스타인 출신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리더의 권한을 준다. [티캐스트 제공]

2019년에 만든 이 영화는 2년 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력 충돌을 예언이라도 하듯, 이런 종류의 영화가 관습처럼 채택해온 해피엔딩을 과감히 버린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연습은 이어졌지만, 우발적인 사고에 이어 평화를 위한 오케스트라 공연은 결국 무산된다.

오케스트라가 해산하는 날 공항.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의 한 남성 바이올리니스트가 라벨의 볼레로를 연주한다.

호응하는 팔레스타인의 여성 연주자. 이어 하나둘씩 악기를 들고 일어선다. 유리벽 너머 상대방을 응시하며 연주하는 양국의 젊은이들. 볼레로의 선율은 간절했다.

오케스트라 오디션 결과, 실력 차이에도 양측 연주자가 절반씩 뽑히자 불공정 논란이 일어난다. [티캐스트 제공]
오케스트라 오디션 결과, 실력 차이에도 양측 연주자가 절반씩 뽑히자 불공정 논란이 일어난다. [티캐스트 제공]

◇ 음악이 할 수 있는 일

증오·혐오·차별은 이중구조를 가진다. 직접 경험을 통해 자연 발생하기도 하지만, 의도·조장·창출되기도 한다. 이는 국가나 사회의 작동 원리가 되기도 한다.

혐오산업은 대개 번창한다. 증오·혐오·차별은 정치가 되고, 정치는 이를 재생산한다. 사람들은 국민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치가 만든 증오·혐오·차별을 내면화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많은 사람이 증오를 정치로 만드는 데 익숙하고 그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적대와 증오로 끊어진 다리를 '감정'으로 연결하는 것은 늘 '치기'로 격하시킨다는 것이다.

예술의 효용은 감정을 정화하고 공유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음악을 통해 증오를 풀어보려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시도는 무모한 치기가 아니라 매우 적절한 해법일 수 있다.

오디션 장면은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찍었다. 사진은 텔아비브 거리 풍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오디션 장면은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찍었다. 사진은 텔아비브 거리 풍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예술이 주는 감동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겠지만, 음악은 충분히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공동 연주를 통해 상대방에 대해 작지만,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지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젊은 연주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감정이 조금씩 퍼져나갈 때 평화의 씨앗은 자라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민의 감정을 동일 잣대로 봐서는 안 되겠지만, 최소한 재생산된 분량의 증오만큼은 음악으로 소거시키려는 시도에 강한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증오와 적대가 있는 곳엔 늘 평화를 향한 투쟁도 있다.

영화에서 오케스트라가 합숙 훈련을 하는 이탈리아 남티롤 지역 풍경 [티캐스트 제공]
영화에서 오케스트라가 합숙 훈련을 하는 이탈리아 남티롤 지역 풍경 [티캐스트 제공]

◇ 텔아비브와 남티롤

영화에서 오케스트라 오디션이 열리는 장소는 텔아비브다.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경제 중심지로 실질적인 수도다.

팔레스타인 연주자들은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이스라엘 군인들의 모욕을 견디며 살벌한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합숙 훈련을 하는 장면은 이탈리아 남(南)티롤에서 촬영됐다. 그림 같은 알프스의 자연이 눈 앞에 펼쳐진다.

분쟁 지역 젊은이들이 평화로운 알프스의 풍경을 보고 화합의 심성을 가져보라는 뜻일 수 있겠지만, 실제 남티롤은 분리주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남티롤을 양도했고, 오스트리아와 역사·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이곳에선 지금까지도 탈(脫) 이탈리아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오케스트라가 화합을 배우는 곳에서 벌어지는 분리주의 운동이 아이러니하다.

합숙 훈련을 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티캐스트 제공]
합숙 훈련을 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티캐스트 제공]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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