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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한국의 고개 ③ 보은 말티재

송고시간2021-06-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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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은 속리산 서쪽 자락에 안긴 작은 고장이다.

당시에 비해서는 관광객이 많이 줄긴 했지만, 최근 비대면 여행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보은을 찾는 사람이 다시 늘고 있다.

충북 보은의 말티재는 1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갯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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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힘겹게 오른 열두 굽이 꼬부랑길

(보은=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보은은 속리산 서쪽 자락에 안긴 작은 고장이다.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속리산과 국보와 보물을 가득 품은 법주사 덕분에 1970∼1980년대 수학여행 1번지로 손꼽혔다.

당시에 비해서는 관광객이 많이 줄긴 했지만, 최근 비대면 여행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보은을 찾는 사람이 다시 늘고 있다.

말티재 꼬부랑길에서 바라본 속리산. 입석대부터 천왕봉까지 주요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전수영 기자]

말티재 꼬부랑길에서 바라본 속리산. 입석대부터 천왕봉까지 주요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전수영 기자]

◇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 '말티재'

충북 보은의 말티재는 1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갯길이다.

보은읍 장재리와 속리산면 갈목리를 연결하는 이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속리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인도에 다녀온 의신조사는 법주사를 세우기 위해 당나귀 등에 불경을 싣고 이 고개를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부처의 자비를 깨우치기 위해 이 고갯길을 거쳐 법주사로 향했다.

당진영덕고속도로 속리산 IC에서 2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장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말티재가 나온다.

말티재 입구에서 해발 430m인 정상까지는 약 1.5㎞. 180도로 꺾어지는 굽잇길을 열두 번도 넘게 돌아야 고갯마루에 닿을 수 있다. 국내 최고의 S자 운전 연습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말티재. 180도로 꺾어지는 굽잇길이 열두 번도 넘게 이어진다. [사진/전수영 기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말티재. 180도로 꺾어지는 굽잇길이 열두 번도 넘게 이어진다. [사진/전수영 기자]

속력을 한껏 낮춰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올라가는 차를 보니 마치 내 숨이 헐떡이는 것 같다.

성족리 동학터널과 갈목리 갈목터널이 뚫리면서 지금은 말티재를 넘지 않고 더 빠른 지름길로 속리산과 법주사에 갈 수 있다.

하지만,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속리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박진수 해설사는 "당시 법주사로 수학여행을 왔던 이들에게는 말티재가 추억의 옛길"이라며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고갯길을 오르다 시동이 꺼져 모두 다 내려서 걸어 오르곤 했다"고 말했다.

해발 430m인 말티재 정상의 표지석 [사진/전수영 기자]

해발 430m인 말티재 정상의 표지석 [사진/전수영 기자]

말티재는 마루(높다는 뜻)의 준말인 '말'과 고개를 의미하는 '티'와 '재'가 합쳐진 이름이다.

한때 박석재라고도 불렸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에 얽힌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왕건은 속리산에서 은거하다 생을 마감한 조부 작제건을 찾아 속리산으로 향하면서 이 고개에 얇은 돌(박석)을 깔아 길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보은현의 동쪽 6km에 있고, 고개 위 1.6km에 걸쳐 얇은 돌을 포장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 행차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서 길을 닦았다'는 기록이 중종 26년(153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조선 7대 왕인 세조 역시 한양에서 청주를 거쳐 속리산으로 향하면서 말티재를 넘었다.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 몸과 마음의 병을 앓았던 세조가 속리산을 찾은 것은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 대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한 신미 대사는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부터 스승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당시 세조는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탄 뒤 고개를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가마가 오르지 못할 정도로 길이 가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티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말티재 입구에는 세조가 고개를 넘기 전 하룻밤 묵었던 행궁터가 있다.

말티재 고갯마루에 있는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 [사진/전수영 기자]

말티재 고갯마루에 있는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 [사진/전수영 기자]

고갯마루에는 터널 형태로 된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이 우뚝 서 있다. 1924년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단절된 말티재 생태축을 복원하기 위해 2017년 세운 것이다.

터널 상층부의 기와를 얹은 건물 위에 흙을 쌓고 소나무 등 자생식물을 심어 야생동물이 오갈 수 있는 생태 숲을 조성했다.

관문 건물에 있는 꼬부랑 카페와 전시장을 지나면 지난해 2월 개장한 말티재 전망대가 나온다.

터널이 뚫리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졌던 말티재가 최근 관광명소로 다시 부상한 것도 이 전망대 덕분이다.

높이 20m의 전망대 끝에 서니 나무 데크가 바람에 흔들려 아찔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불구불한 말티재가 한눈에 보인다. 거대한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올라오는 모양새다.

지난해 개장한 말티재 전망대. 20m 높이의 전망대에 서면 말티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진/전수영 기자]

지난해 개장한 말티재 전망대. 20m 높이의 전망대에 서면 말티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진/전수영 기자]

전망대 옆쪽으로는 말티재 둘레를 따라 조성한 도보길인 '말티재 꼬부랑길' 입구가 있다. 말티재의 구불구불한 지형을 그대로 살려 조성한 109 굽이의 비포장 길(10km)이다.

말티재 일대에는 전망대와 도보길 외에도 다양한 관광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속리산 집라인'은 공중에서 스릴을 만끽하며 말티재와 속리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산악 집라인이다.

출렁다리(115m)를 포함해 모두 8개 코스로 이뤄진 집라인의 총 길이는 1천683m. 작년 11월 부분 개장해 지금은 6∼8코스가 운행 중이다.

속리산 집라인 8개 구간 가운데 5번째 구간인 출렁다리. 집라인에서 내려 출렁다리를 건넌 뒤 다시 집라인을 타고 내려간다. [사진/전수영 기자]

속리산 집라인 8개 구간 가운데 5번째 구간인 출렁다리. 집라인에서 내려 출렁다리를 건넌 뒤 다시 집라인을 타고 내려간다. [사진/전수영 기자]

출렁다리(5코스)와 연결된 6코스는 속리산 풍광이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구간이다. 시야가 좋은 날에는 법주사 금동미륵대불까지 볼 수 있다.

가장 스릴 넘치는 구간은 제일 길면서 경사가 급격한 마지막 8코스다. 소나무 숲을 발끝으로 스치듯 지나가면서 온몸으로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집라인과 함께 모노레일도 이곳에 설치되고 있다. 7월 모노레일이 완공되면 집라인 전 구간을 운행할 예정이다.

말티재 인근에 조성된 솔향공원에서는 스카이바이크가 인기다. 높이 2∼9m의 레일을 따라 소나무 숲 사이를 달리며 솔 내음을 만끽할 수 있다.

총 1.6㎞의 코스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5분. 중간중간 전기 동력을 이용해 자동 운행되는 구간이 있어 힘들이지 않고 주변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가속도가 붙는 내리막 코스가 하이라이트다.

집라인 8개 구간 가운데 가장 스릴 넘치는 구간은 마지막 8코스다. [속리산 레포츠 제공]

집라인 8개 구간 가운데 가장 스릴 넘치는 구간은 마지막 8코스다. [속리산 레포츠 제공]

◇ 1천500년 세월을 버틴 격전의 현장…삼년산성

'보은 관광 1번지'인 속리산과 법주사도 물론 좋지만, 좀 더 한적한 곳에서 호젓하게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삼년산성으로 가보자.

청주와 대전, 상주를 잇는 자리에 위치한 보은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서로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상주를 점령한 신라는 천신만고 끝에 백두대간을 넘어 보은으로 나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축성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해 '삼년산성'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년산성 서문으로 들어섰을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성벽. 무너져내린 것을 복원한 부분으로 원래 성벽과 돌의 색깔이 다르다. [사진/전수영 기자]

삼년산성 서문으로 들어섰을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성벽. 무너져내린 것을 복원한 부분으로 원래 성벽과 돌의 색깔이 다르다. [사진/전수영 기자]

보은군 보은읍의 동쪽, 해발 325m의 오정산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져 있다.

총 길이 1천640m인 성벽의 높이는 12m에서 최고 20m에 이르고, 너비는 8∼10m에 달한다.

조선 시대까지 축조됐던 성곽들의 너비가 대부분 3m 안팎인 것에 견주면 여간 기골이 장대한 것이 아니다.

성을 쌓는 데 쓰인 돌은 1천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 성을 쌓을 때 보은의 돌이 다 없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성벽의 높이는 12m에서 최고 20m에 이르고 너비는 8∼10m에 달한다. [사진/전수영 기자]

성벽의 높이는 12m에서 최고 20m에 이르고 너비는 8∼10m에 달한다. [사진/전수영 기자]

납작한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를 병행하면서 엇물리도록 쌓아 무척 견고하다. 1천500년을 너끈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수많은 전투가 이 산성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기록상 삼년산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철옹성이었다고 한다.

납작한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를 병행하면서 엇물리도록 쌓았다. [사진/전수영 기자]

납작한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를 병행하면서 엇물리도록 쌓았다. [사진/전수영 기자]

주 출입구인 서문에서 시작해 성벽을 따라 산책하는 데에는 1시간 반가량 걸린다. 서문으로 들어서 오른쪽 성벽을 따라 오르니 성벽 아래로 보은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의 들판 너머로 보이는 산은 백제의 동쪽 끝이었다. 이 들판은 하루가 멀다 하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다.

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빼어난 곳은 옛 봉수대다. 지금은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사방이 환하다.

장쾌하게 자락을 펼친 속리산과 너른 보은의 들녘 그리고 정겨운 시골 마을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말티재의 구불구불한 도로도 아스라이 보인다.

삼년산성에서 바라본 말티재 [사진/전수영 기자]

삼년산성에서 바라본 말티재 [사진/전수영 기자]

서문 근처에는 '대정 13년 보은 모범림'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세워진 비석임을 알 수 있다.

박진수 해설사는 "일제가 산성 주변에 빼곡하게 나무를 심어 성벽을 가리는 교묘한 방법으로 산성을 훼손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문 근처에는 '대정 13년 보은 모범림'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전수영 기자]

서문 근처에는 '대정 13년 보은 모범림'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전수영 기자]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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