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먹방] "양조는 과학입니다"

미생물 전문가가 만드는 전통주…장성 청산녹수

(장성=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물 맑기로 유명한 전라남도 장성군. 이곳의 오래된 폐교를 개조해 양조장을 만든 김진만 대표는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다.

연세대 공대 식품생물공학과를 졸업하고 미생물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전남대 생명산업공학과 교수이면서 양조장 주인이기도 하다.

'과학으로 전통을 계승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장성에서 13년째 술을 빚고 있다.

60년 된 폐교를 개조해 만든 전남 장성의 양조장 청산녹수 [사진/조보희 기자]
60년 된 폐교를 개조해 만든 전남 장성의 양조장 청산녹수 [사진/조보희 기자]

◇ 과학으로 계승하는 전통

누룩은 전통주의 맛과 향기를 결정짓는 재료다. 가양주를 빚던 시절, 술이 집마다 제각기 다른 맛과 향을 냈던 것은 누룩이 지닌 개성 때문이었다.

전통 누룩에는 100여 종의 야생 미생물이 들어 있다고 한다. 누룩을 띄우는 과정에서 밀, 쌀 등 재료에 들어 있는 미생물에 공기 중의 미생물이 더해진다.

지역에 따라 누룩을 빚는 재료도 조금씩 달랐고, 집마다 누룩을 빚는 환경도 다르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있는 미생물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각기 다른 미생물들은 발효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물질을 만들어 낸다.

전통 누룩으로 빚은 술이 복합적이면서도 서로 다른 맛과 향을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술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일등 공신은 누룩 속 미생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누룩은 전통주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재료다. [청산녹수 제공]
누룩은 전통주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재료다. [청산녹수 제공]

수많은 미생물이 살아 숨 쉬는 전통 누룩은 입국(한 가지 균을 쌀에 주입해 만든 일종의 개량 누룩)과 달리 복합적인 맛과 향을 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미생물이 뒤섞여 있는 만큼 품질 관리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누룩에 포함된 다양한 미생물들이 모두 다 좋은 술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건에서 발효되느냐에 따라 같은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물질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누룩에 포함된 수많은 미생물 가운데 술의 맛과 향을 좋게 하는 미생물들만 뽑아낼 수 있다면, 또 이 미생물들이 좋은 술을 만드는 최적의 발효 조건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맛과 향이 우수하면서도 균일한 품질을 지닌 술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대표는 다양한 종류의 누룩을 직접 빚어 사용한다. [청산녹수 제공]
김 대표는 다양한 종류의 누룩을 직접 빚어 사용한다. [청산녹수 제공]

전남 장성에 있는 양조장 청산녹수는 이런 '미생물 과학'을 양조에 적용해 술을 빚는 곳이다.

양조장을 설립한 김진만 대표는 미생물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전남대 생명산업공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는 미생물 전문가다.

술을 좋아하고 술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자신이 보유한 특허를 바탕으로 2009년 양조장을 설립해 벤처기업 인증을 받았다.

김 대표는 "실험을 통해 누룩에 포함된 여러 미생물 가운데 술의 향미를 좋게 하는 미생물을 선발해 배양시켜 양조에 적용하고 있다"며 "이렇게 하면 술의 품질을 균일하게 하면서 생산성도 향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선택된 미생물들이 최상의 맛과 향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저온 발효 기법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도 추운 겨울에 빚은 술을 좋은 술로 쳐줬는데 직접 실험을 해봐도 낮은 온도에서 발효할수록 미생물들이 훨씬 더 좋은 향미를 낸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온도가 조절되는 거대한 스테인리스 통에서 막걸리가 발효되고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온도가 조절되는 거대한 스테인리스 통에서 막걸리가 발효되고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청산녹수에서는 종류에 따라 13도, 15도, 20도의 저온에서 술을 발효시킨다. 2주면 완성되는 일반 막걸리보다 낮은 온도에서 발효하기 때문에 술이 완성되는 데에는 최소 40일이 걸린다.

특허를 받은 산소 발효 기술도 청산녹수만의 양조 비법이다.

김 대표는 "발효 과정에서 산소가 언제, 얼마나 공급되느냐에 따라 효모가 만들어내는 물질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술맛도 달라진다"며 "산소 공급을 조절해 최적의 발효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산소 발효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 60년 된 폐교를 양조장으로

양조장이 위치한 장성은 예로부터 물이 맑기로 유명한 곳이다.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에는 지하에서 물이 방울처럼 솟아오르는 신비의 샘인 '방울샘'(전라남도 기념물 제186호)이 있다.

물 좋은 곳을 찾아 장성에 터를 잡은 김 대표는 들판 한가운데 10여 년간 방치됐던 폐교를 사들여 양조장으로 꾸몄다. 술을 빚으면서 술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치기에는 학교 건물이 제격이다 싶었다.

막 쪄낸 고두밥을 꺼내 식히고 있다. 한 번에 240㎏의 쌀을 찌고 식히는 것은 가장 고된 작업 중 하나다. [사진/조보희 기자]
막 쪄낸 고두밥을 꺼내 식히고 있다. 한 번에 240㎏의 쌀을 찌고 식히는 것은 가장 고된 작업 중 하나다. [사진/조보희 기자]

양조장은 학교 건물의 특성을 살려 방문객이 양조 과정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복도를 따라 1학년 1반부터 6학년 1반까지 창문을 넘어 교실 안을 들여다보면 누룩 만들기, 고두밥 찌기, 상온 발효, 저온 발효, 여과, 숙성, 제성(블렌딩), 포장 등 양조의 전 공정을 견학할 수 있다.

마지막 '과학실'은 미래의 술을 위한 연구개발이 이뤄지는 연구소다. 김 대표는 이곳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영재' 효모와 곰팡이를 갖가지 꽃이나 과일, 누룩 등으로부터 발굴해 배양한다.

미래의 술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되는 '과학실' [사진/조보희 기자]
미래의 술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되는 '과학실' [사진/조보희 기자]

1층 시음장에서는 청산녹수에서 생산하는 각종 술을 시음해 볼 수 있다.

여인의 뒷모습을 형상화한 호리병에 담긴 '사미인주'는 청산녹수가 2009년 첫 제품으로 내놓은 막걸리다.

장성에서 생산된 유기농 햅쌀과 직접 빚은 누룩에 인공 감미료 대신 벌꿀을 넣었다. 고급 재료를 사용해 1천원대의 기존 막걸리와 차별화한 프리미엄 막걸리다.

딸기 우유처럼 핑크빛이 도는 '편백숲 산소 딸기 스파클링 막걸리'는 요즘 청산녹수에서 가장 잘 팔리는 히트 제품이다.

막걸리의 부드러운 질감과 딸기즙의 달콤한 맛, 톡톡 튀는 탄산의 상큼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한 병(940㎖)에 1만3천원으로 막걸리치고 비싼 편이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20∼30대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톡톡 튀는 탄산은 병입 후 발효 과정을 한 번 더 거치면서 형성된다.

발효와 숙성을 마친 막걸리에 장성의 특산물인 딸기즙을 첨가해 병입한 다음 냉장고에서 한 차례 더 발효시키면서 탄산을 끌어 올린다. 샴페인을 만드는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딸기즙이 들어간 '편백숲 산소 딸기 스파클링 막걸리' [청산녹수 제공]
딸기즙이 들어간 '편백숲 산소 딸기 스파클링 막걸리' [청산녹수 제공]

병입 후 발효 과정에도 '과학'이 적용된다. 병에 압력계를 달고 압력을 측정해 탄산량이 적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제품을 출고하는 것이다.

병입 후 열흘에서 보름간 냉장 발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술이 완성되는 데에는 50일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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