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곳] 자산(玆山)과 흑산(黑山)

대의명분으로 포장한 개인적 출세욕 경계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정약전은 넓은 바다와 그곳에서 사는 바다 생물에 관심을 갖는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정약전은 넓은 바다와 그곳에서 사는 바다 생물에 관심을 갖는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역사란 사실로 존재했던 소설이며, 소설은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다'라는 공쿠르 형제의 말을 떠올려보면 역사소설이나 사극이야말로 역사와 소설 각각의 본질이 하나로 구현된 흥미로운 장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사실과 허구가 버젓이 뒤섞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소설은 상존하는 왜곡의 위험성에도 수많은 소설가와 영화감독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은 매력을 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당시 흑산도로 유배된 조선 시대 학자 손암 정약전 이야기다.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을 집필하게 되는 스토리를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흑백 화면에 담았다.

정약전은 흑산도와 우의도에서 모두 1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정약전은 흑산도와 우의도에서 모두 1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많은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인 정약전(설경구 분)의 말과 행동에 주목하지만, 사실 영화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며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인물은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쓰는 데 옆에서 도움을 준 창대(변요한 분)라는 청년이다.

이는 정약전이라는 인물이 좀처럼 각색하거나 손대기 부담스러운 역사적 팩트(fact)라면, 창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감독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는 픽션(fiction)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류학서인 '자산어보' 서문에는 창대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 짧게 들어있다.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해 자연물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초청해 함께 숙식하면서 책을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이 서문 외에 창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 2천년대 초반 대흑산도 인근 대둔도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됐고, 정약전이 창대에게 지어준 시가 전해질 뿐, 그 밖의 모든 것은 상상의 산물이다.

감독이 자신의 상상력이 맘껏 발휘될 수 있는 인물에 영화의 엑기스를 담았을 것이라고 보는 건 자연스럽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쓰는 데 큰 도움을 준 창대가 해녀 복례와 함께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구본을 들고 신기해하고 있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쓰는 데 큰 도움을 준 창대가 해녀 복례와 함께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구본을 들고 신기해하고 있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 '사람공부 대신 바다공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정약전은 성리학 대신 섬 주민들의 생활과 지천으로 보이는 바다 생물에 관심을 두고 섬 청년 창대에게 도움을 청한다. 창대는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창대가 혼자 글공부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한다. '도움'이 아니라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성리학에 대한 배움이 깊어진 창대는 혼외자식인 자신을 버린 양반 아버지(김의성 분)를 찾아가 호소하고 결국 아버지의 도움으로 과거를 보고 육지에서 관직까지 얻게 된다.

그런데 정약전은 공부를 통해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창대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은거지?"

배운 것을 이용해 핍박받는 백성들을 위한 큰 정치를 하고 싶다는 게 창대의 생각이었지만, 정약전은 그런 창대의 대의를 개인적인 출세욕으로 규정짓는다.

물론 이 부분은 모든 창대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픽션이다. 하지만 어지러운 사색 당쟁 속에서 억울하게 유배된 뒤 물고기들의 세계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키워가던 정약전이 창대의 야심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정약전은 섬 청년 창대에게 글공부하는 것을 도울 테니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제안한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정약전은 섬 청년 창대에게 글공부하는 것을 도울 테니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제안한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 개인의 욕망과 대의명분

창대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육지로 나가 벼슬을 얻었지만, 죄 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아전들의 난장을 두 눈으로 보고는 결국 흑산도로 돌아온다. 그가 손댈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망가져 있었다.

영화에서 정약전은 제자인 창대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경험하고 판단하도록 격려하지 않고 호통을 치며 가르치려고 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꼰대'에 가깝다.

그럼에도 개인적 출세욕을 대의명분으로 포장하지 말라는 정약전의 가르침은 되새겨볼 만하다.

목민(백성을 기른다)이라는 대의명분 이면에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고 싶은 창대의 이기적 욕망이 숨어있음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선비의 본분인 사회정의의 실현에는 관심이 없는 사이비 지식인을 향원(鄕原)이라 하고 '도덕의 적'으로 경계했다.

자산어보 서문에서 정약전은 섬 청년 창대에 대해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해 자연물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하고 있다'고 썼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자산어보 서문에서 정약전은 섬 청년 창대에 대해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해 자연물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하고 있다'고 썼다.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입신양명하려는 창대의 욕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리더는 충돌하는 욕망을 정리해야 한다. 구성원들의 욕망을 원칙과 대의에 따라 교통정리 해야 하는 리더는 당연히 그 속에서 자신의 욕망도 처리해야 한다.

창대와 같이 관직에 나가려는 사람, 지금으로 보면 정치에 뜻을 품거나 한 조직의 리더가 되려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도록 내세울 건 내세우고 희생할 건 희생해야 한다. 그게 어쩌면 불가피할지도 모를 리더의 위선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사회적 대의와 개인적 욕망은 혼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리더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고 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추워질 때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흑산도가 아닌 신안군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등지에서 촬영했다. 사진은 자은도의 분계 해변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영화는 흑산도가 아닌 신안군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등지에서 촬영했다. 사진은 자은도의 분계 해변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자산과 흑산

정약전은 15년간의 유배 생활 중 처음 7년과 마지막 1년을 우이도에서 보냈다.

처음 우이도에 살면서 영화에도 나오는 문순득의 표류기를 기록한 '표해시말'을 썼고, 중간에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우이도는 당시 소흑산도로 불렸는데, 일본 강점기부터 소흑산도는 가거도의 다른 이름이 됐다.

자산어보의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에서 흑(黑)의 느낌이 어둡고 무서워 이를 자(玆)로 대체한 것이다.

영화는 흑산도의 촬영 여건을 고려해 인근 섬 중에서 실제 유배지와 가장 유사한 조건을 가진 전남 신안군의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등에서 찍었다.

정약전이 거주하는 초가집은 탁 트인 바다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도초도의 절벽 위에서 촬영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 깎아지른 갯바위, 빽빽한 해송 숲이 어우러진 해변의 절경 속에서 어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포구는 자은도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두사춘이라는 사람이 피신해 왔다가 생명을 보전한 뒤 주민들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품은 섬이다.

신안군 도초도의 해변 풍경. 정약전이 거주하는 초가집 세트장은 도초도에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신안군 도초도의 해변 풍경. 정약전이 거주하는 초가집 세트장은 도초도에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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