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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숲과 물이 곱고 역사가 숨쉬는 척야산수목원 길

동창사삼독립운동을 주도한 김덕원 의사 기림터
척야산을 끼고 흐르는 용호강(내촌천) [사진/전수영 기자]
척야산을 끼고 흐르는 용호강(내촌천) [사진/전수영 기자]

(홍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봄이면 만발하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홍천 척야산수목원은 독립운동가 김덕원 의사를 기리는 곳이기도 하다. 숲과 물이 곱게 어우러진 산하에 민족정기가 서린 듯하다.

척야산은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해발 403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오래전에 이 지역에 보를 만들어 농경지를 개척했는데 '척야'(拓野)라는 이름의 유래다.

산기슭에는 물 맑은 용호강이 휘돌아간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강은 굵은 허리를 뒤틀어 용트림하듯 산을 휘감는다. 크지 않은 산이지만 당당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곳에 홍천을 대표하는 트레킹길 중 하나인 척야산수목원 길이 조성돼 있다.

홍천에는 수타사 산소길, 내면 문암마을 산책 코스 등 8개의 도보여행 길이 만들어져 있다. 수타계곡의 비경을 품은 산소길이나 '살만한 둔덕'이라는 뜻의 살둔 마을을 끼고 있는 문암마을 코스 등은 적잖게 알려져 있다.

척야산수목원 길은 아름답고 걷기 편해 묵묵히 걷고자 하는 걷기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다. 청로각비 입구에서 시작해 수목원과 용호강변을 걷고 난 뒤 원점 회귀하는 이 코스는 최단 거리가 3.1㎞ 정도 된다. 그러나 수목원 샛길들을 훑고 구석구석을 살핀다면 4∼5㎞를 걷게 된다.

척야산수목원 길은 청로각비 입구∼척야산∼아랫용호터∼용호대길∼청로각비 입구로 진행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전날 밤에 많은 눈이 내려 수목원이 새하얀 설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매봉산, 아미산, 고양산 등 큰 산들도 한결같이 흰 눈을 이고 있었다. 고요히 서 있는 눈 덮인 산은 장엄하고 경건했다.

민족정기수련 광장 [사진/전수영 기자]
민족정기수련 광장 [사진/전수영 기자]

수목원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민족정기수련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동창사삼독립운동 기념비, 광개토왕비, 발해석등, 김덕원 의사 추모비 등 한민족 정신을 상기하는 비석과 기념물들이 있었다.

동창사삼독립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동창 마을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을 말한다.

홍천군 내 내촌면, 호야면, 문현면, 내면, 서석면, 안재면, 기린면 등의 주민 1천여 명이 참여했다. 김덕원 의사가 주도했던 이 운동은 강원도에서 일어났던 최대 규모의 독립 만세 운동으로 평가된다.

김 의사는 동창사삼운동 주도 후 일본 경찰을 피해 척야산 밑 용호터에 있는 농가 다락방에서 3년 동안 숨어 지냈다. 용호터에는 다락방이 복원돼 있고, 옆에 김 의사 기념관이 건립돼 있다.

척야산수목원은 김 의사의 후손인 김창묵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이 사비를 들여 조성한 곳이다. 수목원인 동시에 운동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올해 100세인 김 회장이 동창만세운동 기념사업을 시작한 지는 30년 가까이 된다.

동창만세운동은 강원도 최대의 독립 만세 운동이었음에도 아직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운동을 증언할 수 있는 인물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어 김 회장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김 회장은 증언자들이 없으면 연구는 기록에만 의존해야 한다며 이 운동에 대한 학계와 국민의 관심을 아쉬워했다.

발해 석등과 광개토왕비를 광장에 세운 데는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역사를 되새겨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는 기념사업회의 뜻이 담겼다. 복제품이지만 석물 재료인 원석을 중국에서 들여오는 등 유물들의 의미를 살리려 적잖게 애썼다.

척야산 능선 위에 우뚝 솟은 청로각(淸露閣) [사진/전수영 기자]
척야산 능선 위에 우뚝 솟은 청로각(淸露閣) [사진/전수영 기자]

민족정기수련 광장에서 조금 올라가면 김덕원 의사를 기리는 곳인 창의사가 나오고, 이어 청로각을 만나게 된다. 청로각은 용호터 다락방에 은신하던 김 의사가 밤이면 올라 나라의 독립을 절규했다고 하는 장소에 세워졌다.

청로각 현판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 쓴 휘호다. 청로각에 오르니 내촌천이라고도 불리는 용호강과 동창마을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동창마을은 지금은 한적한 시골 동네지만 옛날에는 활기가 넘치는 번화가였다. 동쪽으로 양양, 서쪽으로 내륙과 서울을 잇는 교통 요충지였고 조운이 발달해 정부의 세곡 창고가 있었다.

청로각에서 내려오면 이미자의 '척야산 진달래' 노래비가 나온다.

척야산은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철쭉꽃으로 유명하다. 황매산, 지리산, 소백산 등의 야생 철쭉 군락지를 제외하면, 인공으로 조성한 가장 큰 규모의 철쭉꽃밭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철쭉꽃을 보려면 두어 달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 날 철쭉은 소담스러운 눈꽃을 피워 이슬 맺힌 듯 청초한 목화꽃을 떠올리게 했다.

척야산수목원에는 꽃피는 언덕, 산객(철쭉)길, 말발도리길, 시크릿 가든 등 꽃나무로 꾸며진 정원이 많다. 봄에는 철쭉꽃이 온 산을 수놓고, 여름에는 목수국이 흐드러지게 핀다.

함박눈에 젖은 나뭇가지와 새순 [사진/전수영 기자]
함박눈에 젖은 나뭇가지와 새순 [사진/전수영 기자]

척야산수목원에는 유난히 휘호와 시비, 비석이 많다. 최규하 전 대통령, 한승수 전 국무총리, 조순 전 서울시장, 최각규 전 강원도지사 등 수많은 정치인과 문인, 학자들이 글을 남겼다.

노래비만 해도 '척야산 진달래' 말고도 설운도의 '용호강'이 있다.

척야산 진달래 왜 그리 붉게 피는가

무슨 사연 그리 많아 붉게 피는가

두견새 울음소리 피보다 더 진하다

님을 보낸 내마음처럼

척야산 진달래 척야산 그 진달래

해마다 피는구나 붉게도 피는구나

가요 '척야산 진달래' 중 일부

척야산 정상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요망대는 고구려 유적 요망대를 본떠 지어졌다. 요망대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의 환도산성 안에 있는 전방 지휘소다.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다.

기념사업회는 후손들이 고구려의 기개를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망대를 재현했다. 지안에서 돌을 가져와 항일광복 운동의 현장에 요망대를 세움으로써 민족 흥성의 염원을 표현했다.

제2 전망대에 오르면 자동차들이 바람같이 달리는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보이고, 발아래로 북한강 상류인 용호강이 굽이쳐 흐른다.

흐르는 세월을 본다는 세류정, 용호강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청류정 등 정자를 지나면 까막쭉배기라고 불리는 척야산 정상에 이른다.

전설에 따르면 천지가 개벽할 때 애처롭게 살길을 찾아 헤매던 까마귀 한 마리가 이곳 나무 끝에 의지해 살아남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척야산 정상인 까막쭉배기 [사진/전수영 기자]
척야산 정상인 까막쭉배기 [사진/전수영 기자]

까막쭉배기를 지나면 열세 굽이 길이 나오고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열세 굽이 길은 어여쁘고 아담했다.

철쭉, 회양목, 목수국 등이 길을 따라 잘 가꿔져 있었다. 눈꽃으로 장식된 길이 열세 굽이나 휘돌아가니 정겹지 않을 수 없다.

이 길은 봄꽃이 만발하는 5월에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길 옆 수목들의 풍성함과 단아함을 볼 때 절정기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수양 회화나무, 수양 느릅나무가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는 광경도 이색적이다.

노송이 많은 소나무 숲 [사진/전수영 기자]
노송이 많은 소나무 숲 [사진/전수영 기자]

척야산에는 꽃나무가 많지만, 노송들로 이루어진 송림이 우거진 것도 특징이다. 노송은 인체 면역력을 높여주는 피톤치드 분출량이 특히 많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척야산에는 공기 중의 비타민이라고 하는 음이온과 피톤치드가 풍부하다.

열세 굽이 길이 끝나면 용호강이 가까워진다. 산 위에서 듣던 물소리는 한층 우렁차게 바뀐다. 용호강변 가까운 곳에 작은 약수터 '영천'이 있었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선비가 이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아, 타고 온 가마를 버리고 걸어 돌아갔다는 전설이 얽힌 약수다.

용호강변에는 강원도 농경문화재로 지정된 동창보 수로가 있다. 수로는 1800년쯤에 만들어졌으며, 서석면 수하리에서 시작해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까지 약 1.5㎞ 이어진다.

수목원 길 코스가 끝날 즈음 용호강변에는 집채만 한 큰 바위가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벼락바위다. 이 바위에 살던 큰 괴물이 사람들을 괴롭히다 산신령이 내린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척야산수목원과 동창마을은 10∼20년 전까지만 해도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오지였다. 주변에 고속도로 등 큰 길이 뚫리면서 탐방객이 늘고 있다. 독립 만세를 외쳤던 '강원도의 힘'도 널리 알려질 것 같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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