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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느린여행, 쉬어가는 간이역 ① 화본역

송고시간2020-12-10 07:30

철길 따라 군위로 떠나는 시간여행…걸음마다 추억이 새록새록

(군위=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키 작은 소나무 두 그루와 함께 서 있는 아담한 간이역,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정미소와 방앗간, 어린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샘솟는 오래된 교실.

시골 주민들을 도시로 안내하던 철길은 이제 도시민을 추억으로 이끄는 철길이 됐다. 빛바랜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련한 풍경들이 그곳에 있었다.

소나무 두 그루와 함께 서 있는 화본역 [사진/조보희 기자]

소나무 두 그루와 함께 서 있는 화본역 [사진/조보희 기자]

◇ 시골 간이역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이왕 '느린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있는 화본역은 여전히 하루 네 차례 승객이 타고 내리는 간이역이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화본역으로 가는 열차는 하루 딱 한 번, 오전 7시 38분에 있다. 열차를 타고 중앙선을 따라 4시간 30분을 달리면 점심 무렵 화본역에 내릴 수 있다.

살굿빛으로 외벽을 칠한 채 수줍은 듯 서 있는 화본역은 빛바랜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누리꾼들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꼽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화본역 대합실 내부. 역에서 쓰던 오래된 소품과 화본역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화본역 대합실 내부. 역에서 쓰던 오래된 소품과 화본역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스르르,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옛날 역무원들이 쓰던 모자와 깃발 등 낡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화본역의 옛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들도 벽을 채우고 있다.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멘 주민들이 기차를 타고 내리며 승강장을 가득 메운 사진 속 풍경은 이제는 추억 속 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화본역의 역사는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완공돼 1938년 보통역으로 출발했다.

시장이 없는 산성면 주민들이 여기서 열차를 타고 영천의 장을 오갔으니 이곳 주민들에게는 생활의 터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영천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아침부터 모여드는 주민들로 기차역이 들썩일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스팔트 대로가 뚫리고 집마다 자동차를 굴리면서 하루 20명 남짓 기차를 타고 내리는 작은 간이역이 되었다.

쇠락해가던 시골 간이역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즈음이다. 마을 주민들과 지자체가 힘을 합쳐 화본역의 옛 모습을 되살리는 '화본역 그린스테이션 사업'을 추진했다.

1930년대 역이 지어질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되살리면서 승강장 한쪽에 폐기차를 개조한 레일 카페를 만드는 등 여행객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꾸몄다.

덕분에 지금은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붐비는 군위의 명소가 됐다.

화본역 급수탑.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는 박상희 작가의 조각품. [사진/조보희 기자]

화본역 급수탑.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는 박상희 작가의 조각품. [사진/조보희 기자]

열차 이용객이 아니더라도 1천원을 내고 입장권을 구입하면 승강장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철길 너머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탑이 눈길을 끈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기차에 물을 대 주던 급수탑이다.

인근에 판 우물에서 지하수를 모아 급수탑 위의 탱크까지 끌어 올린 뒤 기차가 들어오면 탱크 밸브를 열고 배관을 통해 물을 기차 속으로 공급했다고 한다.

1930년대 말 지어진 화본역 급수탑은 전국에 얼마 남지 않은 급수탑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연산역 급수탑을 비롯해 대부분의 급수탑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화본역 급수탑은 누구나 직접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탑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하단 지름 5m에 높이는 25m나 된다.

관광객들이 내부 벽면에 새긴 수많은 낙서 사이에 '석탄 정돈, 석탄 절약'이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문구다.

화본역 급수탑 내부 [사진/조보희 기자]

화본역 급수탑 내부 [사진/조보희 기자]

◇ 추억이 방울방울…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화본마을

화본역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 역 주변에는 주말이면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맛집들도 생겨났다.

역 바로 앞에 있는 꽈배기 집도 그중 하나다. 갓 튀겨낸 꽈배기를 하나 사 들고 호호 불어가며 동네를 천천히 둘러봤다.

마을 어귀를 지키고 서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를 지나니 오래된 정미소와 방앗간, 전파상, 시골 다방이 길 따라 이어진다.

마을 어귀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 [사진/조보희 기자]

마을 어귀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 [사진/조보희 기자]

주인이 떠나고 남은 빈집 외벽마저 낡은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장식해놨다.

담장에 그려진 그림들도 산책의 재미를 더한다. 군위군이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알려주는 벽화들이다.

단군신화와 만파식적 등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벽화로 담았다.

저자인 일연 스님은 말년에 군위에 있는 인각사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본마을을 거닐다 보면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담은 벽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화본마을을 거닐다 보면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담은 벽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마을을 지나다 보면 인도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고인돌도 만날 수 있다.

고인돌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오래된 일본식 건물이 서 있다. 1930년대 지어진 화본역 관사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민박 시설로 운영된다고 한다.

한때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학교는 마을 인구가 점점 줄면서 문을 닫았다.

아이들이 떠나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은 폐교는 주민들의 손길을 거쳐 추억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주민들이 폐교를 개조해 만든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사진/조보희 기자]

주민들이 폐교를 개조해 만든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사진/조보희 기자]

교실 안으로 들어서니 어린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삐거덕대는 조그만 책걸상과 아이들의 손때가 묻는 낡은 책가방, 난로 위에 놓인 양은 도시락, 교탁 옆에 나란히 놓인 풍금과 커다란 주판…칠판 위에 걸려있는 '옆반 정복'이라는 급훈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교실 옆에는 1970∼1980년대 마을 풍경을 재현한 공간도 있다.

잡화점부터 사진관, 이발소, 전파상, 만화방, 연탄 가게 등을 옛 모습 그대로 되살려 아기자기하게 꾸며놨다.

주말에는 학교 운동장에 추억의 먹거리와 지역 농산물을 파는 장이 선다.

뒷마당에서는 공예, 다도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운영된다.

옛 교실의 정겨운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옛 교실의 정겨운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 바람도 구름도 머물다 가는 곳, 화산마을

아기자기한 화본 마을을 뒤로 하고 고로면 화북리의 화산마을로 향했다.

화산마을은 요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한창 뜨고 있는 군위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고랭지 밭과 풍력 발전기가 있는 해발 700∼800m 산 위에 위치해 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마을이다.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저 멀리 언덕 위에 빨간 지붕을 얹은 풍차가 나타났다.

화산마을 안에서도 전망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화산산성 전망대'다.

화산산성 전망대의 빨간 풍차 [사진/조보희 기자]

화산산성 전망대의 빨간 풍차 [사진/조보희 기자]

차를 대고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굽이굽이 펼쳐진 산줄기와 그 안에 포근하게 안긴 군위호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거울처럼 반들반들한 수면 위로 파란 하늘에 걸린 구름이 그대로 비친다.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동틀 무렵에는 발아래 넘실대는 운무가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두 채의 너와집은 얼마 전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도 소개된 김수자 씨의 '자연닮은 치유농장'이다.

천연염색을 직접 체험해 보고 너와집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는 곳이다.

흙으로 지은 너와집 마당에는 노오란 메리골드와 붉은 아마란스가 가득했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힐링이 될 것 같다.

화산산성 전망대 바로 밑에 있는 '자연닮은 치유농장'에서 바라본 군위호 [사진/조보희 기자]

화산산성 전망대 바로 밑에 있는 '자연닮은 치유농장'에서 바라본 군위호 [사진/조보희 기자]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7년 전 이곳에 홀로 정착한 김씨는 농장을 운영하면서 마을 부녀회장도 맡고 있다.

화산산성 전망대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마을 아래에는 화산산성 성곽이 남아있다. 조선 숙종 35년(1709)에 병마절도사 윤숙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비를 들여 지은 산성이라고 한다.

당시 높이 4m의 성벽을 200m가량 구축하던 중 심한 흉년 때문에 공사를 중단해 아쉽게도 완공되지는 못했다. 지금은 140m가량 성곽이 남아있다.

산성 북문터에는 성곽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었다. 커다란 돌들을 아치 형태로 이어 안과 밖에 두 개의 문을 만들어놓았다.

얼마나 이음새를 정교하게 만들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처럼 단단히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새삼 놀라웠다.

성곽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화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탄하며 지은 칠언절구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누가 화산에 밭을 일구려 하는가

신선의 근원이 여기서 비롯되었네

여보게, 구름사다리를 빌려주구려

옥정에 가을바람 불면 푸른 연꽃 따리로다.

군위와 영천의 경계에 있는 화산(華山)은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나 보다.

하지만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62년 정부의 산지개간정책에 따라 180여 가구가 집단 이주하면서 생긴 개간촌이 바로 화산마을이다.

당시 불모지였던 이곳에 정착한 이들은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산마을과 외부세상을 잇는 7.6㎞의 꼬불꼬불한 시멘트 길은 당시 주민들의 힘으로 어렵게 개척한 통로였다. 이들이 억척스럽게 일궈온 고랭지 채소밭은 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을 완성하는 보물이 됐다.

지난해에는 황무지로 방치된 해발 800m 산 정상 부지 3천평에 해바라기밭을 조성하고 축제를 열었다.

주민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축제 덕분에 화산마을은 농식품부가 주최하는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환경 부문 금상을 받기도 했다.

화산에서 본 노을 [사진/조보희 기자]

화산에서 본 노을 [사진/조보희 기자]

기왕 힘들게 화산산성 전망대까지 올라왔으니 맞은 편에 있는 해바라기 축제장까지 가보기로 했다.

산 정상에 있는 해바라기 축제장까지 가는 길은 더 좁고 험했지만, 충분히 올라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화산산성 전망대보다 해발 100m가량 더 높은 곳에 있어 전망대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산 정상에 설치된 나무 데크에 오르니 아름다운 마을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7기의 풍력 발전기와 고랭지 채소밭 너머로 화산산성 전망대의 빨간 풍차와 군위호까지 한눈에 보인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해바라기가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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