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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때] 늦가을 숲이 품은 소설의 정경…이효석 문학의 숲

메밀꽃 없어도 좋은 '메밀꽃 필 무렵' 무대
이효석 문학의 숲 [사진/조보희 기자]
이효석 문학의 숲 [사진/조보희 기자]

(평창=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구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원도 평창에서 소금을 뿌린 것 같은 메밀꽃을 기대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메밀꽃은 소설의 제목이 말해주듯 '필 무렵'에 가야 볼 수 있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9월을 한참 지나 초겨울의 문턱에 다다른 11월에 꽃구경을 기대할 순 없다.

그렇지만 만개한 메밀꽃이 아니어도 이효석 소설이 주는 멋과 문학적 풍취를 자연 속에서 사철 오감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봉평에 있는 '이효석 문학의 숲'이다.

이효석 문학의 숲에 조성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사진/조보희 기자]
이효석 문학의 숲에 조성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사진/조보희 기자]

강릉행 KTX가 지나는 평창역에서 버스로 10여분, 승용차라면 영동고속도로 장평IC에서 8㎞만 가면, 이효석 문학의 향기가 물씬한, 오로지 소설가 이효석을 위한 숲을 만날 수 있다.

이효석 문학관의 지근거리에 별도로 조성된 일종의 문학 공원이자 산책로다.

무엇보다 이곳은 '숲'이다. 33㏊의 야산 자락에 조성된 숲에는 늘씬한 자작나무와 늠름한 낙엽송을 위시해 산벚나무, 돌배나무, 적송, 전나무, 개살구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빽빽하다.

숲속은 소설을 위한 테마공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낙엽 깔린 오붓한 길가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첫 구절을 새긴 커다란 돌이 방문객을 맞는다.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돌 위에 손끝을 얹어보니 성급한 겨울 냉기에 머리카락이 쭈뼛해왔지만, '등줄기를 훅훅 볶는' 한여름 중천의 해를 상상하며 어느새 이효석의 세계로 빠져든다.

문학의 숲 산책로 [사진/권혁창 기자]
문학의 숲 산책로 [사진/권혁창 기자]

산책로에 연이어 등장하는 메밀꽃 필 무렵의 구절들을 읽으며 지나다 보면 소설 속 무대도 나타난다. 충주집에서 한잔하는 동이의 밀랍 인형은 오랜 친구인 듯 정겹다. 물레방아에서도, 장터에서도, 소설은 머릿속에서 재연된다.

느릿느릿 걸으며 돌에 새긴 구절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는 한 모녀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 모녀는 메밀꽃 필 무렵을 읽지 않았거나, 최소한 아주 오래전에 읽어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모녀는 돌에 적힌 구절만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유추해 내고 있었다.

곳곳에 방문객이 있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숲은 우리에게 많은 걸 준다. 동시에 깨닫게 한다. 맑은 공기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청량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숲속으로 이어진 산책로는 대부분 계단 없는 데크로 조성돼 노약자가 걷기에도 불편함이 없다. 소설 구절을 읽을 수 있는 산책로가 500m, 등산로는 2.7㎞ 길이다. 문학의 향기와 숲 내음이 한데 어우러져 더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문학의 숲 산책로에는 소설 구절이 담긴 돌이 이어져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문학의 숲 산책로에는 소설 구절이 담긴 돌이 이어져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

이효석 문학의 숲에 왔다면 가까운 봉평 5일장과 허브나라농원에도 들려보자.

봉평 5일장은 봉평 전통시장에서 끝자리가 '2'와 '7'인 날, 즉 매달 2, 7, 12, 17, 22, 27일에 열려 2·7장이라고도 불린다.

문학의 숲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으면 시장 입구가 바로 가산 공원이다. 가산(可山)은 이효석의 호다. 동상과 문학비도 있고 공원 안쪽에는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충주집도 재현해 놓았다.

시장은 생각보다 크다. 메밀로 만든 각종 음식과 식재료, 버섯, 산나물 등 봉평의 특산물은 물론, 서양의 유명 벼룩시장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중고물품도 골목골목 길바닥 돗자리 위에 빼곡하다.

봉평 5일장 모습 [사진/조보희 기자]
봉평 5일장 모습 [사진/조보희 기자]

시나브로 기울어진 초겨울 햇살에 행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무렵, 소설에서 동이와 허생원이 들렸을 법한 장터 주막에 들어가 메밀전병에 메밀 막걸리를 시켰다.

노릇하게 구워진 전병을 속살까지 한입에 털어 넣으니 시원한 막걸리가 당기고, 감칠맛 나는 막걸리를 한 입 들이키면 다시 전병이 그리워지니, 접시와 잔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허브나라농원에 들리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1993년 개장해 30년 가까운 연륜을 자랑하는 테마 관광농원인 이곳은 역시 꽃이 만개한 화려한 시즌은 아니지만, 지금 간다면 늦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유리 온실 안에는 싱그러운 허브와 수많은 실내용 화초들이 저마다 호화로운 색감과 맵시를 뽐낸다. 한겨울에도 즐길 수 있는 사계절 공간이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외부 가든에서도 자연을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허브나라농원 온실 내부 [사진/권혁창 기자]
허브나라농원 온실 내부 [사진/권혁창 기자]

수북이 쌓인 낙엽, 앙상해진 낙엽송 사이로 빛나는 차가운 햇살, 계절의 변화가 주는 영문 모를 쓸쓸함도 어느새 즐거움이 된다.

KTX를 타고 평창역까지 가서 당일에 이효석 문학의 숲과 허브나라농원, 봉평 5일장을 둘러보고 오는 '언택트 평창 다이닝 투어'가 코레일관광개발의 여행 상품으로 나와 있다.

투어 이름에 '다이닝'이 붙은 것은 이효석 문학의 숲에서 먹을 '동이도시락'을 주기 때문인데, 현지 농산물로 만든 도시락이 꽤 알차다.

이 투어는 11월 말까지 진행되며, 내년 초 날씨 등 여건에 맞춰 재개될 예정이다.

현지 농산물로 만든 '동이도시락' [사진/조보희 기자]
현지 농산물로 만든 '동이도시락' [사진/조보희 기자]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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