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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그곳] 남매의 여름밤

'관계'와 '기억'의 이중주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옥주와 동주는 반지하 집을 떠나 할아버지 집에 들어와 살면서 소소한 일상으로 여름밤의 기억을 채워간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옥주와 동주는 반지하 집을 떠나 할아버지 집에 들어와 살면서 소소한 일상으로 여름밤의 기억을 채워간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오슨 웰스의 기념비적인 영화 '시민 케인'(1941)은 미스터리에 가까운 수수께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언론 재벌 케인이 "로즈버드!"라는 뜻 모를 말을 남긴 채 사망하자, 기자가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고인의 생전 지인들을 만나고 다닌다.

기자는 끝내 '로즈버드'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고, 쓸모없어진 케인의 물건들은 모두 불 속으로 던져진다.

마지막 장면, 불타기 직전의 한 물건이 클로즈업되는데, 거기에 '로즈버드'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케인이 어린 시절 즐겨 타던 썰매라는 사실을 관객들은 알게 된다.

이 영화의 긴 여운은 기자가 로즈버드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이유에 숨어 있다.

사람들은 사회적 명망가의 마지막 외마디가 어린 시절 썰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죽음이 추억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영화 속 기자도 해결할 수 없다.

정원에서 방울토마토를 따는 할아버지와 동주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정원에서 방울토마토를 따는 할아버지와 동주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2018)의 주인공 임지호 셰프는 얼굴도 보지 못한 생모의 흔적을 찾아 평생 전국 곳곳을 떠돌며 살았다.

그는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인연이 닿아 내가 만든 이 음식을 어머니의 혈육들이라도 맞이했으면 좋겠다"며 길에서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에게 정성스럽게 음식을 대접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건 그가 남다른 인격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다. 그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찾고 싶은 뭔가가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요리라는 방식으로 그걸 해결하려고 했을 뿐이다.

이 두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 '무엇'의 정체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화 '남매의 여름밤'(연출 윤단비)을 권한다.

가족이라는 '관계', 그리고 여름밤이라는 '추억'의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엮은 이 영화는 최근 몇 년 새 본 가장 '예쁜' 영화로 기억된다.

할아버지의 생일에 동주가 가족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할아버지의 생일에 동주가 가족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 무빙 온(Moving On)과 기억

주인공 옥주는 아빠, 남동생 동주와 함께 살던 반지하 집을 떠나 할아버지 집으로 옮겨 지내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 살던 집을 떠나기 전에 옥주는 마치 무엇인가 찾기라도 하듯 집안을 두리번거린다.

아빠의 재촉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차를 타고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동안, OST '미련'(신중현 작사·작곡)이 흘러나온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 오프닝은 가볍지 않다.

'남매의 여름밤'의 영어 제목은 '무빙 온'(Moving On)이다. 머무르는 공간을 옮긴다는 뜻인데, 주인공 옥주에게는 살아왔던 특정 공간을 떠나면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장소와의 이별'에 대한 일종의 의식 행위일 수 있다.

동시에 이 모습은 할아버지 집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관계들에 대해서도 '추억'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옥주가 할아버지 집에서 보내는 여름밤의 기억들은 자잘하고 소소하다. 누구나 겪는, 그러나 가슴속에 작은 기억으로 반짝이는, 그런 일상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해 질 무렵 옥주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 운동장을 돌자, 동주는 자기도 한번 타보자며 조른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해 질 무렵 옥주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 운동장을 돌자, 동주는 자기도 한번 타보자며 조른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옥주는 남동생 동주와 모기장을 놓고 다투고, 해 질 무렵 자전거로 학교 운동장을 돌고, 할아버지 생일잔치에 선물을 준비하고, 고모와 누워 어릴 적 꿈 얘기를 하고, 아빠가 파는 가짜 브랜드 운동화를 몰래 남자친구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물론 옥주네 식구들은 여유로운 중상류층이 아니다. 부모의 이혼, 떠돌이 장사를 하는 아빠, 할아버지의 병환,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온 고모…하지만 이런 일들이 '여름밤의 기억'을 옥주에게서 빼앗아가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은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옥주와 동주는 장례를 치르고 할아버지가 없는 집에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에 앉아 아빠가 오기를 기다린다.

할아버지가 없는 식탁에 셋이 앉아 밥을 먹다가 옥주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카메라는 잠을 자는 옥주의 모습을 비춘다. 울다가 잠이 들었는지, 언제부터 잠을 잤는지 확실치 않다. 영화는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비어있는 집 공간이다. 할아버지의 흑백 사진, 볕이 드는 나무 계단, 2층 테라스, 정원 텃밭의 빈 의자. 부재의 공간은 이제 옥주가 추억해야 할 길고 긴 여정을 기다릴 뿐이다.

옥주는 남동생 동주와 다투는 일이 많지만, 서로를 챙겨주기도 한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옥주는 남동생 동주와 다투는 일이 많지만, 서로를 챙겨주기도 한다. [오누필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 추억의 정체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은 인간의 모진 숙명이다. 과거에 대한 추억과 향수가 현재 시점에는 가지지 못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결핍과 부재를 보상하려는 심리의 작동이라는 해석을 부인하기 어렵다.

추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시대가 순수하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인간은 결국 긴 세월 부딪쳐 살아온 모든 공간에 조금씩 자아를 빼앗긴 뒤 뒤늦게 현재와는 다른 과거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행복과 기쁨을 찾는, 과거를 양분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임지호 셰프가 찾아 헤맨 것은 그의 인생에서 부재했던 관계와 그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는 죽음을 맞는 시간에 찾아낸 기억이자 잃어버린 자아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천 월미공원 인근 풍경. 영화는 대부분 인천에서 찍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천 월미공원 인근 풍경. 영화는 대부분 인천에서 찍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영화는 대부분 인천에서 촬영했다.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월미도공원도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인천 남구 숭의동에 있는 낡은 2층 양옥집과 골목길이다. 그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누구에게나 소소하게 반짝이는 기억들을 불러내는 공간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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