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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일본의 자충수가 만든 소녀상 '베를린 모델'

송고시간2020-10-15 07:07

베를린 시민사회, 반일민족주의 아닌 보편주의로 소녀상 지키기

일본의 '한일 분쟁사안' 프레임…초기성공했으나 반발 초래

'철거명령' 베를린당국을 적으로 몰지않아…논리전으로 협의 길 열어

소녀상, 베를린 시민과 함께 전철을
소녀상, 베를린 시민과 함께 전철을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4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전철을 타고 기림일 행사장인 브란덴부르크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2019.8.14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 수도 베를린의 시민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알려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

일본이 쳐놓은 반일 민족주의 프레임에 빠지지 않았다.

반일 구호 없이 전쟁 시 여성 성폭력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내세워 베를린 도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지켜낼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에는 반민족주의적이면서 다양한 민족의 공존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힘겹더라도 '작은 발걸음'으로 전진시키는 베를린 시민사회의 힘이 뒷받침됐다.

일본의 강력한 로비가 전개되는 가운데 소녀상 철거 명령을 내린 베를린 당국을 적으로 돌려세우지 않았다.

논리전을 통해 토론과 협상의 길을 열었다.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소녀상의 존치 여부에 대한 시민단체와 당국 간의 협상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국의 철거 명령 당시만 해도 암울한 상황이었던 소녀상 문제의 국면이 전환하게 된 것은 일본의 로비가 부메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일본 측은 소녀상을 일종의 반일 캠페인으로 여겨왔다. 반일 민족주의로 몰아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 사안으로 가둬놓으려는 것이다.

독일 사회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초록 동색으로 바라본다. 나치 시대에 아리안 민족주의가 전체주의로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역사의 교훈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일본 당국은 독일 당국을 상대로도 이런 논리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미테구청의 철거 명령 공문에는 소녀상의 비문을 문제 삼으며 한국 측 입장에서 일본을 겨냥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등 다분히 일본 측 논리가 투영돼 있었다.

일본의 압박과 로비는 소녀상 철거 공문으로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베를린 시민사회를 과소평가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압박과 로비는 소녀상의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더욱 발현시켰다.

일간 타게스차이퉁은 14일 관련 기사에서 "일본 정부가 자책골을 넣었다"면서 독일에서의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를 알리는 운동이 "베를린 시민사회를 풍요롭게 했다"고 평가했다.

2018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한 베를린에서의 거리 집회 [베를린=연합뉴스]

2018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한 베를린에서의 거리 집회 [베를린=연합뉴스]

◇ 베를린 시민사회에 자리잡은 위안부 문제…정치권·언론·학계 지원사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독일 시민사회 속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 왔다.

지난 2018년 3월 9일 세계 여성의 날에 베를린 도심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나와 집회와 행진을 벌였다. 행진은 축제와 같았다. 시민들은 몸을 흔들면서 행진했다.

시위대의 선두에 선 트럭에서는 테크노 음악이 흘러나왔다. 트럭에는 20대 교민 여성 임다혜 씨도 타고 있었다. 임 씨는 트럭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홍보하고 있었는데,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엄숙하게 다뤄지지 않아 왔다. 축제와 같은 거리 시위 등을 통해 베를린 시민사회 속으로 조금씩 녹아들어 갔다.

더구나 소녀상 설치를 주관한 현지 한국 관련 시민단체인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는 소녀상 설치와 관련해 지역사회와도 소통해왔고, 지역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교육 활동을 벌여왔다.

이번 철거 명령 사태 속에서 코리아협의회가 40여개 현지 시민단체, 지역 시민들과의 연대를 자신했던 것은 이런 활동이 누적돼왔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연대가 이뤄지기 전인 지난 13일 철거 반대 집회에는 시민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집회는 역시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코리아협의회 등은 일본의 사죄를 요구해왔지만 반일 구호를 내걸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국제적, 보편적 인권 문제임을 강조해왔다.

13일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일구호는 나오지 않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테구청의 결정을 논리적으로 비판했다.

예술계에서도 예술의 자유를 강조하며 힘을 보탰다. 베를린조형예술가연합은 12일 성명에서 "공공장소의 예술작품이 다른 국가 정부의 압력으로 철거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도 베를린자유대, 튀빙겐대, 라이프치히대 등의 교수진이 철거 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언론에서도, 정치권에서도 미테구청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일간 베를리너차이퉁은 13일 기사에서 "국가 간 역사 분쟁에서 일방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미테구청의 논리를 비판하며 "이런 논리라면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서의 범죄도,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베를린 장벽 건설에 대해서도 우리가 상기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이 신문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면서 "일본 정부는 오늘날까지 전쟁 책임과 성폭력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있고, 자국을 전적으로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베를린 연립정부의 한 축인 사회민주당의 미테구 지부장인 야니크 한은 13일 일간 타게스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소녀상은 전시 여성 성폭력 문제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면서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광범위한 시민사회가 참여해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압력과 로비에서 비롯된 철거 명령이 베를린 시민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각시킨데다, 과거사를 덮으려는 일본의 잘못된 시도까지 홍보하게 된 셈이다.

베를린 거리에 설치된 소녀상 비문 읽는 시민들
베를린 거리에 설치된 소녀상 비문 읽는 시민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지난 25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쓰인 비문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읽고 있다. 2020.9.27 lkbin@yna.co.kr

◇ 감정싸움 자제속 협의테이블 마련…1년기한 소녀상의 영구설치 기회될까

코리아협의회는 철거 명령 공문을 받은 뒤 격앙된 분위기였지만, 분노를 미테구청에 보내지 않았다.

당국을 감정적으로 자극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기조를 세웠다.

대신 언론(베를리너차이퉁)이 슈테판 폰 다쎌 미테구청장에 대해 "일본 정부의 수족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3일 철거 명령 반대 기자회견에서 시민단체들은 당국을 규탄하지 않고 당국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런 논리 싸움의 방식은 미테구청이 퇴로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다쎌 청장은 기자회견에 이어 미테구청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며칠간 소녀상의 역사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마스크를 착용한 채 시위대 속에 있다가 '깜짝' 발언을 요청하며 법원에 시민단체의 가처분 신청이 접수돼 소녀상의 철거 명령이 유보됐다는 점을 알렸다.

그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지난 7일 철거 명령이 떨어진 이후 철거 기한 전날 '소녀상 지키기'의 '절반의 성공'이 이뤄진 셈이었다.

시민단체와 미테구청 간의 감정싸움으로 이어지지 않은 점은 미테구청과의 추후 협의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철거 명령을 무위로 돌린다고 해도 소녀상의 전시 기한은 애초 1년이다. 연장을 위해선 당국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협의 테이블을 통해 오히려 영구 전시의 길을 열을 수도 있다. 여러 정당과 시민단체가 논의에 참여한다면 소녀상의 보편적 가치를 더욱 인정받을 기회가 될 수 있다.

코리아협의회의 한정화 대표는 통화에서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독일의 역사로 만들고 싶다"면서 "베를린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모범 사례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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