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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쉼이 있는 여행 ② 전주 인재고택 학인당

110년의 역사와 숨결 가득한 곳에서 특별한 하룻밤

(전주=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오래된 고장에는 오래된 집이 있다.

오랜 세월 닳고 닳아 반들반들해진 대청마루, 그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달빛,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따사로운 아침 햇살…

고즈넉한 쉼이 그리울 때, 지나온 시간을 오롯이 품은 고택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은 어떨까?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인재고택 학인당의 야경 [사진/전수영 기자]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인재고택 학인당의 야경 [사진/전수영 기자]

◇ 전주 한옥마을의 유서 깊은 고택 '학인당'

전주는 두말이 필요 없는 고도(古都)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며 도읍으로 삼았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본향인 전주가 조선 왕조의 뿌리가 됐다.

한옥마을은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지만, 이처럼 깊은 전주의 역사에 비하면 그리 오래된 동네는 아니다.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양곡을 수송하기 위해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개설되면서 전주부성은 풍남문을 제외하고 자취를 잃었다.

그러면서 성 밖에 머물던 일본인이 성안으로 진출해 상권을 형성했다. 이에 반발한 전주 사람들이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한옥촌을 조성했다. 이것이 지금의 한옥마을이다.

한옥마을 내 이름 있는 한옥은 많아도 100년 넘은 고택이 흔치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학인당 정원 한가운데 붉게 익어가는 석류 [사진/전수영 기자]
학인당 정원 한가운데 붉게 익어가는 석류 [사진/전수영 기자]

인재고택 학인당은 20세기식 개량 한옥이 즐비한 전주 한옥마을 내 민가 중 가장 역사가 깊은 한옥이자 유일한 문화재(전북민속자료 8호)다. 1908년에 지어졌으니 올해로 112살이다.

집을 지은 이는 조선조 성리학자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의 11세손인 백낙중(1882∼1930) 선생. 만석꾼이자 전주의 대부호였던 그는 장자 백남혁이 태어난 1905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해 2년 8개월 만에 아흔아홉 칸 저택을 완성했다.

궁중 건축 양식을 도입해 지어진 학인당은 구한말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함께 한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설 자리를 잃어가던 이 지역 명창들의 공연 무대로 활용됐고, 해방 이후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이 묵어가는 영빈관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산당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이 무단점거해 사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백낙중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이 집은 2007년부터 고택 체험 공간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지금은 백낙중의 5대손인 백광제(39) 씨 부부가 운영하며 방문객을 맞고 있다.

고종이 내려준 현액에는 백낙중의 효행을 치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전수영 기자]
고종이 내려준 현액에는 백낙중의 효행을 치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전수영 기자]

◇ 구한말부터 근대까지…굴곡진 역사와 함께 한 공간

솟을대문 앞에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현액이 눈길을 끈다. '효자승훈랑영릉참봉수원백낙중지려'(孝子承訓郞英陵參奉水原百樂中之閭)라고 적혀 있다.

고종이 백낙중의 효행을 치하해 승훈랑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학인당(學忍堂)이라는 이름은 백낙중의 호 인재(忍齎)에서 따온 것이다.

삐그더억∼ 대문 열리는 소리가 정겹다. 안으로 들어서니 본채 앞 마당에 잘 가꿔진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연못가에 서 있는 소나무와 진분홍빛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본채와 멋스럽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마당 한가운데 조성된 연못의 이름은 조선지(朝鮮池). 한반도의 좌우가 뒤집힌 모양이다.

이 집이 지어질 무렵 조선은 이미 일본의 침탈을 받고 있었다. 집을 지은 백낙중은 나라 잃은 슬픔을 뒤집힌 한반도의 모습으로 표현하며 세상이 다시 뒤바뀌어 국권이 회복되길 기원했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열면 본채 앞 마당에 잘 가꿔진 정원이 펼쳐진다. [사진/전수영 기자]
솟을대문을 열면 본채 앞 마당에 잘 가꿔진 정원이 펼쳐진다. [사진/전수영 기자]

지금은 530평의 부지에 7채의 한옥만 남아있지만, 1908년 지어질 당시 학인당은 2천여평의 부지에 지어진 아흔아홉 칸 저택이었다.

이 집을 짓는 데 들어간 공사비가 백미 4천석(8천 가마), 공사에 투입된 연인원은 4천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수십억원을 들여 지은 셈이다.

단순히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궁궐 건축을 담당했던 도편수와 대목장들이 궁중 건축양식을 차용해 공들여 지었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압록강과 오대산 등지에서 공수한 금강송이다.

추녀 쪽에서 직선으로 솟아오른 처마나 지붕을 받치는 둥근 도리 기둥 등은 궁궐이나 유명사찰에서나 썼던 기법이라고 한다.

본채에서 내다 본 정원 [사진/전수영 기자]
본채에서 내다 본 정원 [사진/전수영 기자]

이처럼 대궐 같은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 연못가에 놓여 있는 임금 왕(王) 자가 새겨진 돌이 이를 말해준다.

백광제 씨는 "6대조 할아버지께서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며 "고종 즉위 이후 경복궁 중건사업에 도움을 요청해 집안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고, 덕분에 큰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 개화기 멋스러움이 더해진 전통 한옥

7채의 한옥 중 중심에 있는 학인당 본채는 이 고택 건축의 백미다. 한지가 아닌 수십장의 유리를 단 여닫이문이 커다란 건물 전면을 감싸고 있다.

외관만 봐도 1908년 당시 최신식 건축 기법을 도입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본채 내부는 여러 개의 방은 물론, 세면장과 목욕탕, 화장실까지 복도로 연결된 구조다. [사진/전수영 기자]
본채 내부는 여러 개의 방은 물론, 세면장과 목욕탕, 화장실까지 복도로 연결된 구조다. [사진/전수영 기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거실 격인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은 물론, 세면장과 목욕탕, 화장실까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천장의 높이는 2층에 가깝다. 7개의 들보를 사용해 칠량 집으로 지어진 본채는 면적이 67평에 달한다고 한다. 보통 한옥의 3채 규모다.

백씨는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첨단시설인 전기 시설과 수도시설까지 도입해 지은 개화기 최신식 한옥"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렇게 큰 집을 지었던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자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전주 대사습놀이의 명맥이 끊기게 됐다.

이를 안타까워 한 백낙중은 이 집을 판소리 공연장으로 이용하려 했다. 본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의 방문을 들어 올리거나 철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대청 마루와 방을 구분하는 문을 들어 올려 단자에 걸어주고 방 사이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여러 개의 방과 마루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여러 명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대청마루와 방을 구분하는 문을 들어 올려 단자에 걸어주고 방 사이 문을 모두 열면 공연을 위한 넓은 공간이 마련된다. [사진/전수영 기자]
대청마루와 방을 구분하는 문을 들어 올려 단자에 걸어주고 방 사이 문을 모두 열면 공연을 위한 넓은 공간이 마련된다. [사진/전수영 기자]

실제로 이 공간에서는 이 지역 유명 소리꾼들이 모여 소리판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

집안 내 최고 웃어른이 기거했던 안방 앞에는 '백범지실'이라고 쓰인 문패가 달려 있다. 방 안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학인당 마당에서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백범이 초대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 전주에 내려와 하룻밤 묵었던 방이다. 당시 백낙중은 자신이 기거하던 방을 기꺼이 내줬다고 한다.

백범지실 옆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이 머물다 간 방인 '해공지실'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학인당에서 하룻밤 묵어가며 찍은 사진 [사진/전수영 기자]
백범 김구 선생이 학인당에서 하룻밤 묵어가며 찍은 사진 [사진/전수영 기자]

◇ 110년의 세월이 살아 숨 쉬는 다락방

본채 구석구석을 안내하던 백씨가 자신이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며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다락이었다.

굳게 잠긴 문을 열고 허리를 숙인 채 다락으로 올라가는 순간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할머니 몰래 다락에 숨어 놀곤 했던 시골 외갓집 추억이다.

2층 구조의 다락방은 조상의 손때가 묻은 유물이 가득한 보물창고다. [사진/전수영 기자]
2층 구조의 다락방은 조상의 손때가 묻은 유물이 가득한 보물창고다. [사진/전수영 기자]

학인당의 다락은 110년 세월을 오롯이 간직한 보물창고였다.

백씨의 증조할머니가 손수 수를 놓아 혼수로 들고 왔다는 병풍, 학인당을 짓게 된 뜻을 새겨넣은 현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흑백사진과 옛 문헌들…

조상의 손때가 묻은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다락의 구조도 독특하다. 천장이 높은 만큼 2층으로 되어 있다.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다.

채광과 환기를 위해 남과 북에 하나씩 합각부를 만들어 각각 창을 낸 점도 독특하다. 덕분에 다락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난 창으로 목을 뻗어 밖을 내다보니 앞마당의 정원 너머로 솟을대문과 사랑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집주인이 이곳을 왜 가장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남쪽 지붕 합각부에 난 다락 창문 너머로 앞마당 정원이 보인다. [사진/전수영 기자]
남쪽 지붕 합각부에 난 다락 창문 너머로 앞마당 정원이 보인다. [사진/전수영 기자]

본채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인이 기거하던 살림집이었지만, 지금은 연회나 촬영을 위한 장소로 대관 되거나 손님이 묵어가는 객실로 사용된다.

다만 각각의 방이 아닌 본채 전체를 빌려야 해 소규모 투숙객이 묵기에는 다소 가격 부담이 있다.

일반 투숙객은 주로 사랑채나 3개의 객실로 이뤄진 별당채를 이용한다.

모든 객실에는 욕실 겸 화장실이 딸려 있으며, 침구 시트는 매일 교체돼 쾌적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별당채의 서쪽 끝 객실 한편에는 아기자기한 다실이 딸려 있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창밖 후원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정원이 워낙 잘 가꿔져 있어 어느 객실을 택해도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솟을대문 동쪽에는 단청 체험, 다례 체험 등 각종 전통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예약하면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설명을 들으며 고택 내부를 투어할 수 있다.

객실 한편에 마련된 다실 [사진/전수영 기자]
객실 한편에 마련된 다실 [사진/전수영 기자]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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