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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때] 문화재의 보고, 서산 ③ 서산마애여래삼존상

기적처럼 원형을 유지한 1천500년 전 '백제의 미소'

(서산=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기적 같은 보존의 '대명사' 서산마애석불. 1천500년의 문화유산 보존을 가능케 했던 건 한국인의 과학 유전자였을까, 인문적 역량이었을까.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사진/조보희 기자]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사진/조보희 기자]

◇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여래삼존상

돌에 새겨진 세 부처의 미소는 온화하고 은은하고 넉넉했다.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린다. 그만큼 보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더 신비로운 것은 빛의 방향,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미소가 다르게 보이고 표정이 바뀐다는 것이다. 아침 10시께 햇빛을 받은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표정의 변화를 살피기 위해 오전 9시께와 햇볕이 쨍쨍한 오후 1시께, 두 번 방문했다. 그러나 범인이 부처의 미소와 표정 변화를 포착하기는 무리였다. 미련한 눈과 둔한 감수성을 탓하며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마애'(磨崖)란 암벽에 조각했다는 뜻이다. 서산 가야산 용현계곡 입구 왼쪽 층암절벽에 새겨진 삼존불은 국내 마애불 중 가장 오래되고 조각미가 걸출하다.

1958년 발견됐고, 4년만인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삼존불은 가운데 여래입상, 오른쪽 보살입상, 왼쪽 반가사유상으로 추정되는 세 보살상으로 구성돼 있다.

여래입상이 현재를 상징하는 석가, 반가사유상이 미래 부처인 미륵, 오른쪽 입상이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각 연대는 백제 후기로 추산된다. 반가사유상의 코, 팔이 조금 부서진 것을 빼면 삼존불은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몸체와 배경 면의 조각선은 뚜렷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불상이 지나온 1천500여 년의 시간을 고려하면 보존 상태는 경이롭다.

잘 보존된 이유로 불상의 위치와 방향을 꼽는 전문가가 많다.

마애삼존불은 처마 역할을 하는 큰 바위 아래 있고, 조각 면이 80도 정도로 기울어져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는다. 용현계곡에서 불상까지 올라오는 길은 3∼4번 꺾여 습기가 조각 면에 바로 와 닿지 않는다. 석공은 조각할 때 이런 과학적 요소까지 고려했을까.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사진/조보희 기자]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사진/조보희 기자]

백제의 미소를 길이 전하고 싶어서였으리라. 당국은 풍화를 방지하기 위해 1974년 보호각을 설치했다. 그러자 마애불에 백화현상이 생기고, 자연 채광에 의한 백제의 미소를 볼 수 없게 됐다. 결국 2006년 보호각을 32년 만에 해체했다.

지금은 관광객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않도록 출입금지 줄과 CCTV만 설치해놓았다. 조각품에 흔히 보이는 손때조차 마애삼존불에는 거의 묻어있지 않았다.

석불은 용현계곡에서 불과 200m 정도 올라간 곳에 있다. 인적이 드물지 않은 곳에서 마애불이 오랫동안 원형을 유지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마애불의 가치를 후대에 더 오래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애불에서 용현계곡을 따라 약 2㎞를 더 가면 백제와 고려 시대를 품은 보원사 절터가 있다.

보원사는 백제 때 창건돼 통일신라, 고려 때 융성했다. 통일신라 때 화엄십찰 중 하나였으며, 한때 승려 1천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창건과 폐사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가야산 기슭에 위치한 절터는 한 눈으로 가늠하지 못할 만큼 넓었다. 절 건물은 없어졌지만 5층 석탑, 당간지주, 석조,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가 광대한 터 여기저기 서 있었다. 이 문화재들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석조는 쌀을 씻거나 그릇 닦을 때 사용했다. 국내 남아 있는 석조 중 가장 크다.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백제 불상인 금동여래입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불 중 가장 큰 고려철불좌상 등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이 국립중앙, 국립부여 박물관 등에 보관돼 있다.

◇ 서산의 풍부한 볼거리

서산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품고 있다. 문화재들은 잘 보존됐다. 부여, 경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문화재의 '보고'다.

서산은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해 예부터 농산물, 해산물 등 먹거리와 물자가 넉넉했다. 중국과 가까운 태안반도에서 예산, 부여, 공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문물이 발달했다. 이 때문에 서산에는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볼거리가 다채롭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청벚꽃이 피는 개심사에는 제석천도, 범천도, 사위보살도, 팔금강도 등 보물로 지정된 불화가 많다. 조선 시대 제작된 달마대사혈맥론 목판 7매, 달마대사관심론 목판 8매도 원형이 보존된 보물이다.

수덕사, 무량사, 마곡사와 함께 충남 4대 사찰인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때(654년) 창건돼 고려 충정왕 때(1350년) 중수됐다.

대웅전 기단석은 백제 때 것이고, 휘어진 나무를 기둥으로 쓴 심검당은 단청을 하지 않아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소박하고 작은 절이지만 불화, 대웅전, 심검당, 명부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여럿이다.

개심사 청벚꽃 [사진/조보희 기자]
개심사 청벚꽃 [사진/조보희 기자]

청벚꽃은 꽃잎이 연둣빛이다. 개심사 청벚꽃은 학계에 보고된 청벚꽃으로는 국내 유일하다. 감염병이 돈 올해 봄에도 명부전 옆에 핀 청벚꽃을 보려는 불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봄이면 서산에는 한우목장에 피는 홑벚꽃을 시작으로, 상왕산 산벚꽃과 겹벚꽃, 개심사 왕벚꽃과 청벚꽃이 차례로 피어나 주민과 관광객을 황홀하게 한다.

우리를 반긴 건 명부전과 연못 옆에 붉게 꽃 핀 배롱나무였다. 어여쁘기가 벚꽃 못지않았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 간월암이라고 불리는 작은 절은 서산 9경 중 3경에 꼽힐 정도로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다. 간월암은 만조 때 섬이 되고, 간조 때 육지와 연결된다. 바닷길이 열리고 닫히는 곳이다.

정오쯤 간조가 되자 간월암 주위로 거대한 갯벌이 드러났다. 물때를 알고 왔는지 호미와 통을 들고 갯벌로 향하는 나들이객들이 적지 않았다. 갯벌에 사는 어패류를 캐기 위해서다.

사방이 바닷물로 가득 찬 오후 5시쯤 만조 때의 간월암은 운치를 더했다. 바닷물이 차올라 간월암으로 가는 길이 끊기자 여행객들은 발을 동동거렸다.

만조 때의 간월암 [사진/조보희 기자]
만조 때의 간월암 [사진/조보희 기자]

간월암에는 수령 250년의 사철나무, 150년의 팽나무가 있다. 사철나무는 중심 줄기가 구불구불 휘어지고 상당 부분 고사한 것 같은데도 잎은 젊은 나무처럼 건실하고 열매에 윤기가 흘렀다. 성스러운 불심이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나 보다.

안견기념관도 빼놓을 수 없다. 서산 출신인 안견은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였다. 신라의 솔거, 고려의 이녕과 함께 3대 화가로 꼽힌다.

안평대군에게서 꿈에 거닌 도원경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완성한 몽유도원도는 15세기 산수화의 걸작이다. 원본은 일본 덴리(天理) 대학에 있고, 국내에는 실물 크기의 영인본 2개가 국립중앙박물관과 안견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2009년 한국박물관 100년을 기념해 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특별전에서 원본이 전시됐었다. 당시 하루에만 1만명 이상이 줄을 서, 1인당 관람 시간이 30초로 제한됐다.

오로지 전시를 보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거나, 30초 관람을 위해 5∼6시간 줄을 선 관람객이 적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감염병 사태로 잠정 폐쇄된 기념관에는 적벽도, 소상팔경도, 사시팔경도 등 안견의 대표작 모사품 18점이 전시돼 있다.

서산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백제, 고려, 조선의 문화재가 다채롭다. 유산이 많기만 한 게 아니라 잘 보존됐다. 서산의 문화유산 보존 유전자(DNA)가 널리 퍼지길 바란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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