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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게임인] 게임은 어쩌다가 '남자들의 장난감'이 됐을까

송고시간2020-08-29 08:00

신간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게임계 여성 혐오 뿌리 들춰

여성 게이머 몰아내는 남성 중심 문화 고발…페미니즘 관점 게임 추천도

신간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도서출판 동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간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도서출판 동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게임 역사의 뒷얘기를 다룬 넷플릭스 신작 다큐멘터리 '하이스코어'에는 초창기 비디오게임 '팩맨'(Pac-Man)의 제작자 이와타니 토루가 "팩맨은 여심(女心)을 사로잡은 덕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외계인을 쏴 죽이는 기존의 최고 인기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와 달리 과일을 먹어치우는 귀여운 팩맨 캐릭터가 '남자들의 놀이터' 오락실에 여자들을 불러들이면서 최고 인기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외계인을 쏴 죽이는 '남성 취향' 게임이라던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최초의 게임 대회를 열었을 때 1위를 차지한 우승자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게임 산업이 태생부터 여성을 어떻게 분리하고 대상화했는지, 그런 성별 구분이 사실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역설적으로 조명한다.

딜루트(필명) 작가가 20일 출간한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는 이처럼 유서 깊은 게임계 여성 혐오의 뿌리를 낱낱이 들추는 신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가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유별난 아이'가 되는지, 남성과 함께 온라인게임을 할 때 얼마나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차별·폭력에 시달리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게임의 주류 문화는 남성을 주 고객으로 설정하고 '여성용 게임'을 하위문화로 따로 분류해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업계나 다른 게이머가 보기에 '여성 게이머'는 어떤 존재일까? (중략) 어린 시절 함께 게임을 즐기던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을까?"(7∼9쪽)

딜루트 작가는 "동화 속에서는 영웅 역할이 대부분 소년의 몫이었는데, '또 다른 지식의 성전'(사진) 같은 고전 게임은 처음으로 내 성별과 이름을 질문했다"면서 "다른 매체에서 여자아이들에게 공주 옷을 입힐 때 게임은 '너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게임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온라인 캡처]

딜루트 작가는 "동화 속에서는 영웅 역할이 대부분 소년의 몫이었는데, '또 다른 지식의 성전'(사진) 같은 고전 게임은 처음으로 내 성별과 이름을 질문했다"면서 "다른 매체에서 여자아이들에게 공주 옷을 입힐 때 게임은 '너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게임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온라인 캡처]

작가는 게임이 "'남성들만의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 문화가 여자아이들을 적극적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게임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거의 모든 장르의 게임을 섭렵한 작가의 해박한 게임 지식에 감탄하게 된다.

새 학년에 올라갔는데 게임 좋아하는 짝꿍을 만나서 "이 게임 해봤어?", "그 게임은 그 장면이 죽이지!"라며 수다 떠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고전 게임부터 RPG, MMORPG, TRPG, FPS, MOBA, VR 게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장르의 게임에 여성 혐오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성은 오락실에 자주 가면 '여자인데 어떤 캐릭터를 잘 쓴다'며 몰래 찍힌 사진이 커뮤니티에 올라온다. 게임 중고 거래를 하러 나가면 '남자친구 사주는 거냐'라거나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불필요한 얘기를 듣는다.

여성 온라인게임 유저는 레이드(raid·수십명의 유저가 전략을 짜서 강한 몬스터를 잡는 활동)를 뛸 때면 남성 유저의 체력을 채워주는 보조 역할을 강제당하고, "(남자들 힘내게) 여자가 마이크 켜고 응원 좀 해줘"라는 성희롱도 당한다.

여성이 게임을 잘하면 '여신', '천사'라며 숭배 당하거나 '남자친구가 대신해줬을 것'이라며 헐뜯긴다.

여성이 게임을 못 하면 '역시 여자라서 못 한다'며 차별·혐오 욕설을 듣는다.

게임 하는 청소년
게임 하는 청소년

[연합뉴스 자료사진]

작가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게임 퀘스트를 깨듯이 여러 게임의 여성 혐오를 파헤치다 보면, 독자는 결국 게임계 여성 혐오를 만든 것이 '일베' 같은 특정 커뮤니티가 아니라 게임계 전반의 남성 중심 문화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게임을 더 재미있게 즐기거나 실력을 키우려면 다른 사람과 정보를 공유하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 표적이 되고 성희롱까지 당하니 성별을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 게이머 인구가 통계적으로는 남성과 비슷할 만큼 늘어났는데도 게임 채팅이나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렇게 게임은 오늘도 특정 성별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그 틈새에서 나타난 여성 게이머는 더 눈에 띄는 존재가 되어 쉽게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73쪽)

책은 "게임이 대중화된 취미가 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기본값'인 게임업계와 커뮤니티 내부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가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되면 새로운 소비자가 유입되는 수보다 기존의 소비자가 이탈하는 수가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해당 문화는 사양 산업이 될 수밖에 없다."(266쪽)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관해 여러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리고 어릴 때는 게임을 했는데 크면서 하지 않게 된 여성들과 다시 게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은 작가가 어릴 때 읽었다는 게임 잡지처럼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여러 개 추천하기도 한다.

페미니즘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게임을 추천하는 작가의 시선은 게임계에 그간 드물었던 만큼 앞으로 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게임 산업은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사람이 굴려 가고" 있으며 "여성 게이머는 어디에나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 편집자 주 = 게임인은 게임과 사람(人), 게임 속(in) 이야기를 다루는 공간입니다. 게임이 현실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두루 다루겠습니다. 모바일·PC뿐 아니라 콘솔·인디 게임도 살피겠습니다. 게이머분들의 많은 제보 기다립니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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