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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그곳] 야구소녀

'자기극복'과 '꼴찌의 추억'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싸이더스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야구의 바이블로 불리는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는 '공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타자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공을 때리려는 욕망과 피하려는 본능의 억제 사이에서 싸운다고 한다. 투수가 던지는 빠른 볼에 타자는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게 되는데 그걸 극복하는 게 타자의 제1 덕목이라는 것이다.

투수의 입장은 이와 정반대다. 투수들의 피칭 전술은 자연히 타자가 갖는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다.

빠른 공을 던질수록 타자가 느끼는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투수에게 공의 스피드는 절대적인 무기다. 자연히 프로 구단은 빠른 공을 가진 투수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절대적인 원칙이란 없고, 다만 경향성의 크기가 존재할 뿐. 그 경향성마저도 뒤집으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는다.

두산 베어스의 투수 유희관은 최고속도 시속 133㎞의 공으로 150㎞대 투수가 즐비한 국내 프로야구에서 7년 연속 두 자릿수의 승수를 달성했다. 빠른 공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빛나는 이정표다.

공의 빠르기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빠른 공을 던지는 데 불리한 신체를 가진 여성도 프로야구에서 통할 수 있는 걸까.

영화 '야구소녀'는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던지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질문 자체가 빠질 수 있는 함정과 무의미함을 경고한다.

주수인은 남자들뿐인 고교 야구단에서 투수로 활약하지만, 졸업 후 프로 선수가 되려는 꿈은 벽에 부딪힌다. [싸이더스 제공]
주수인은 남자들뿐인 고교 야구단에서 투수로 활약하지만, 졸업 후 프로 선수가 되려는 꿈은 벽에 부딪힌다. [싸이더스 제공]

◇ '천재 야구소녀'의 꿈

어려서부터 주변 남자아이들보다 키도 크고 야구도 월등히 잘했던 주수인(이주영 분)은 '천재 야구소녀'로 불리며 남자들뿐인 고등학교 야구단에서 투수로 활약하지만, '20년 만의 여자 고교 선수'라는 타이틀에서 딱 멈춰 섰다.

고교 졸업 후 프로 선수가 되려는 꿈은 늘 현실의 벽을 깨닫지 못하는 무모함이나 철없음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수인이 던지는 시속 130㎞의 공이 여자로선 대단한 것이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통할 수 없다는 주변의 평가가 수인의 꿈을 좌절시키지는 못한다.

"안 되는 거면 빨리 포기해.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라고 질타하며 딸이 자신이 근무하는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원하는 엄마의 희망도 수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나의 미래를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끝까지 야구를 하고 싶은 수인의 집념은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프로 구단에서 선수가 아니라 프런트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은 수인은 프런트 일은 여자니까 더 잘 할 수 있다는 말에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속 130㎞의 공을 칭찬하면 그는 "내가 백삼십 던지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왜? 그게 왜 대단한 건데?"라고 반문한다.

수인은 남자 선수와 다른 기준으로 평가받기를 거부한다.

남자들 틈에서 훈련하는 수인 [싸이더스 제공]
남자들 틈에서 훈련하는 수인 [싸이더스 제공]

◇ 젠더 영화?

이쯤에서 영화는 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꿈을 꿀 자격조차 의심받는 여성의 문제, 차별을 막고 차이를 긍정하는 제도적·심리적 배려가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 여성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수인이 여자이건 남자이건, 그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신분, 성별, 환경 등 그를 둘러싼 외피로 그를 규정하고,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사회적·집단적 시선이다.

안 되는 것은 빨리 포기하라는 엄마의 말은 현실 세계에서 부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지는 않아"라는 수인의 말이 무모함으로만 치부되는 세상은 '가짜'일 수 있다. 타인의 시선 속에 갇혀 타인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그게 진짜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그 '가짜 세상' 말이다.

영화는 사회적 성공과 실패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기계적 남녀평등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허술한 젠더 영화도 아니다.

"당신들이 나의 미래를 어떻게 알아"라는 진중한 물음에 많은 사람의 작은 공감을 끌어내고 싶은 '자기극복'의 영화에 가깝다.

프로 선수가 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지만, 수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싸이더스 제공]
프로 선수가 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지만, 수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싸이더스 제공]

◇ '꼴찌의 추억'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실존 인물인 안향미 선수는 1997년 한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고등학교(덕수정보고) 야구부에 입학했다. 1999년 4월 대통령배대회 배명고와 준결승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상대 타자를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시킨 후 바로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전국대회 공식경기 데뷔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안향미는 체육특기생 입학 자격을 갖췄음에도 대학으로부터는 기숙사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이유로, 프로구단으로부터는 기량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입단을 거부당했다.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야구장은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 와이번스 구장이다.

SK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이 경기장은 인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SK행복드림구장으로 2002년 개장했다.

프로야구 인천 연고팀은 SK 와이번스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빈번한 주인 교체로 바람 잘 날 없었는데, 프로야구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선사한 '꼴찌의 추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꼴찌'여도 행복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들, 그리고 SK의 '행복드림구장'은 오롯이 스스로의 생각과 기준을 담은 수인의 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야구장은 SK 와이번스의 홈구장인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영화에 등장하는 야구장은 SK 와이번스의 홈구장인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09/11 07:3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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