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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년] ① "일본 뛰어넘는다"…부품·소재분야 똘똘 뭉쳤다

송고시간2020-08-13 07:05

日 수출규제 계기, 창원국가산단 연구소·기업 일본산 국산화 박차

바늘만한 굵기 미세가공 드릴 등 원천기술 확보…"기술자립 중요"

창원국가산업단지 전경
창원국가산업단지 전경

[경남 창원시 제공]

(창원=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경남 창원시에 있는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기계연구원 재료연구소.

두산중공업 등 창원국가산업단지 기업들과 협력해 최근 1m급 고강도 타이타늄 블레이드(Blade)를 국산화하는 개가를 올렸다.

블레이드는 발전기, 추진기 등의 날개를 뜻한다. 가스터빈, 스팀터빈 등 발전설비 출력을 좌우하는 핵심부품이다.

1m급 고강도 타이타늄 블레이드는 지금까지 일본 등 외국에서 전량 수입했다.

연료를 적게 쓰면서 고출력을 얻으려면 회전하는 블레이드가 가볍고 단단하면서 커야 한다.

재료연구원과 참여기업들은 1m급 고강도 블레이드 제조에 필요한 단조·가공·장착·평가 과정을 모두 국산화했다.

홍재근 재료연구소 타이타늄 연구실장은 "타이타늄은 철강보다 비중이 50% 정도로 가볍지만, 성형성이 떨어져 원하는 형태로 만들기가 힘든 금속이다"며 "국내 업체 중에 타이타늄을 가공해 길쭉한 날개 형태로 만드는 기술을 가진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홍 실장은 "지난해 일본 수출규제 후 해외에서 조달해야 했던 핵심 품목을 우리가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한층 커졌다"며 "2018년부터 시작한 블레이드 국산화에 더 박차를 가해왔다"고 말했다.

국산화한 대형 가스터빈 블레이드
국산화한 대형 가스터빈 블레이드

재료연구원과 두산중공업 등 기업이 개발한 가스터빈 핵심설비인 블레이드. [두산중공업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민간 기업의 일본산 의존 장비 등 국산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창원국가산단 내 초정밀공구 생산업체인 성진엔테크는 지난해 8월 반도체 부품인 실리콘 웨이퍼를 가공하는 다이아몬드 마이크로 드릴을 개발했다.

반도체 웨이퍼 가공용 마이크로 드릴은 일본, 미국 기업이 시장을 선점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대기업들은 주로 일본 제품을 사다 웨이퍼를 가공한다.

1993년 창업한 성진엔테크는 정밀공구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판 기업이다.

이 회사는 지난 10년간 시행착오를 거쳐 초정밀 절삭공구인 다이아몬드 마이크로 드릴을 국산화했다.

이 드릴은 머리카락 4배 두께에 불과한 아주 작은 구멍을 뚫거나 깎는 미세 가공을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전기·전자, 우주항공, 자동차, 의료 등 산업 전 분야에서 미세 공정을 처리할 수 있는 초정밀 공구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드릴은 끝이 뾰족하고 표면에 꼬인 홈이 새겨져 있다.

성진엔테크가 개발한 다이아몬드 마이크로 드릴은 바늘만한 굵기다.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인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바늘 크기로 가공한 후 표면에 꼬인 홈을 파고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 기술 핵심이다.

강호연 성진엔테크 대표이사는 "다이아몬드를 보석처럼 두껍게 가공하기는 쉽지만, 머리카락 굵기로 만들기는 극히 어려웠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몬드라도 머리카락 굵기 정도로 만들어 놓으니 힘을 주자 쉽게 부서졌다.

그는 "거기다 홈까지 파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10년이나 걸렸다"며 "산업 전 분야에 적용 가능한 초정밀 드릴 제조 원천기술을 확보했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성진엔테크가 개발한 반도체 가공용 정밀절삭공구
성진엔테크가 개발한 반도체 가공용 정밀절삭공구

[성진엔테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본이 강제징용판결 보복으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시작한 때는 지난해 7월이다.

당시 경남 창원국가산업단지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 다른 산업에까지 경제보복을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창원 기업인들 사이에 팽배했다.

창원국가산업단지는 기계 산업 메카다. 금속을 깎아 다른 기계, 부품을 만들어 '마더 머신'(mother machine)이라 불리는 공작기계를 중심으로 국내 기계, 기계 부품 70%가량이 창원국가산업단지에서 생산된다.

소재 기업은 창원시 기계제품, 부품 성능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창원 산단 기계·소재 기업들은 일본산 제품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산업 태동기인 1970~1980년대 창원 산단 기업들은 가까운 일본 기업과 기술협력을 했다.

기술 전수를 해 준 곳이 일본 기업인 탓에 공작기계 두뇌 역할을 하는 '수치 제어반' 등 핵심 부품을 자체 개발하지 않고 일본에서 들여와 조립하거나 가공하는 업체가 여전히 많다.

이정환 재료연구소 소장은 "창원 기업들은 금속 제품을 깎고, 찍어내고, 용접, 조립하는데, 굉장한 강점이 있다"며 "그런데 단조, 성형가공, 용접, 조립 장비 제품이나 부품의 상당수가 아직도 일본산이다"고 털어놨다.

그는 "가공기술은 뛰어난데 원천기술을 갖지 못해 팔다리만 만들고 두뇌는 만들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일본 수출규제 (PG)
일본 수출규제 (PG)

[장현경 제작] 일러스트

그만큼 1년 전 수출 규제는 창원 산단에 큰 위기로 다가왔다.

창원 산단 한 기업인은 "일본이 우리 급소를 찌르려고 하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윤종수 창원상의 회원지원본부장은 "일본 기업과 거래하지 않는 창원 기업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일본산 소재·부품 공급이 끊길까 걱정하는 기업인들이 많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우려했던 일본 제품 공급 중단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년간 누적된 일본 의존에서 벗어나야 하는 필요성을 모두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연구소부터 기업에 이르기까지 기술 자립 중요성에 눈을 떴다.

창원공단 내 자동차 부품기업인 '삼현' 황성호 대표이사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확대하면 큰일 날 거란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회사부터 부품, 장비 국산화에 나서고 당장 국산화가 어려운 부품은 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독일산으로 교체해 위험부담을 줄였다"고 말했다.

삼현도 최근 일본 자동차 부품사가 한국 완성차 업계에 공급하던 핵심부품 국산화에 성공했다.

경남 창원시 한국기계연구원 재료연구소 전경
경남 창원시 한국기계연구원 재료연구소 전경

[재료연구소 제공]

재료연구소 등 연구기관은 원천기술 연구와 동시에, 연구 결과를 산업화하는 속도를 높여 지역 기업이 일본기술을 대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12월 타이타늄 연구실, 금속분말 연구실 등 재료연구소 연구실 2곳을 '국가연구실'로 지정해 소재기술 연구기반을 강화했다.

올 초에는 철강연구소, 알루미늄 연구소를 국가연구실로 추가 지정해 소재 국산화를 가속화 했다.

20대 국회는 폐회를 앞둔 지난 5월 한국기계연구원 부설 재료연구소를 독립연구법인인 재료연구원으로 승격하는 법안을 처리했다.

1년 전 수출 규제를 계기로 소재·부품 독립 중요성을 국가 차원에서 뒤늦게 인정한 것이다.

재료연구소는 올해 말 재료연구원으로 승격해 소재·부품 기술 개발을 진두지휘한다.

창원 산단 다른 기업도 소재·부품 분야에서 주목할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대호아이엔티는 고효율 탄화규소(SiC) 섬유 발열 소재를, 칸워크홀딩스는 유압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전기구동 공작기계를 최근 속속 개발했다.

이정환 소장은 "일본이 수출 규제를 보복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가 원천기술을 갖추지 못해서였다"며 "이번에는 일본이었지만, 앞으로는 어느 나라가 무슨 이유로 수출규제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내에서 원천기술을 개발해 공급을 안정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sea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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