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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일본] 월계관 쓴 손기정의 84년 전 시상대 표정

송고시간2020-08-09 12:07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국적 찾는 작업은 미완

1936년 8월 9일 손기정(가운데)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시상대에서 월계수 화분을 들고 서 있다. 같은 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남승룡(화면 왼쪽)과 2위로 입상한 어니스트 하퍼가 함께 시상대에 올랐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1936년 8월 9일 손기정(가운데)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시상대에서 월계수 화분을 들고 서 있다. 같은 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남승룡(화면 왼쪽)과 2위로 입상한 어니스트 하퍼가 함께 시상대에 올랐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9일은 마라톤 영웅 손기정(1912∼2002)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지 84년 주년이 된 날이다.

시상대에 올라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보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 단연 눈길을 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약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손기정이 든 월계수 화분에 가려 가슴의 일장기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 신문에 실린 손기정 수상 장면
일본 신문에 실린 손기정 수상 장면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1936년 8월 11일자 도쿄아사히신문에 시상대에 올라선 손기정의 사진이 실려 있다.
한국에서 일장기 말소 사건이 발생한 것과 달리 일장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sewonlee@yna.co.kr

일장기와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가 조국을 상실한 청년 손기정의 마음을 무겁게 했음을 웅변하는 사진이다.

같은 대회에서 3위로 입상해 함께 시상대에 선 남승룡(1912∼2001)이 '너는 월계수로 일장기를 감출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어서 괴로웠다'고 푸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손기정을 괴롭게 한 것은 시장식장의 기미가요와 일장기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기정 우승 소식 전한 일본 신문…기미가요 부각
손기정 우승 소식 전한 일본 신문…기미가요 부각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1936년 8월 10일자 도쿄아사히신문 호외(오른쪽)와 같은 날 발행된 요미우리신문 조간(왼쪽)에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이 실려 있다.
두 신문 모두 손기정의 우승으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됐다는 것을 제목으로 뽑았다. 2020.8.9
sewonlee@yna.co.kr

금메달 소식을 전한 당시 일본 주요 신문을 보면 제국주의 일본이 손기정을 철저하게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사히(朝日)신문의 전신인 도쿄아사히신문은 1936년 8월 10일 호외에서 "보라. 양(兩) 선수 손에 월계수, 회장에는 울려 퍼지는 감격의 기미가요"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손기정이 한반도 태생이라는 점을 기사에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는 힘을 다해 일본을 위해 달린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후 트랙을 빠져나가는 손기정. 다비(足袋)라고 불리는 일본식 버선 모양의 신발을 들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손기정은 당시 신고 있던 신발이 작은 탓에 물집이 생겨 매우 괴로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베를린 올림픽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후 트랙을 빠져나가는 손기정. 다비(足袋)라고 불리는 일본식 버선 모양의 신발을 들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손기정은 당시 신고 있던 신발이 작은 탓에 물집이 생겨 매우 괴로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마이니치(每日)신문의 전신인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은 시상대에 선 손기정과 남승룡의 사진 옆에 "월계관에 빛나는 '마라톤 일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손기정과 국제전화로 인터뷰했다며 호외에 실은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등장한다.

"국민 모두 매우 기뻐합니다. 기미가요가 들렸을 때의 감상은 어떠했나요"(요미우리신문 본사)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감격했습니다"(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 선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 선 손기정

[연합뉴스 자료사진]

훗날 손기정의 발언이 당시 진짜 속마음을 이해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는 1992년 8월 9일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에 대해 "황영조의 가슴엔 일장기 히노마루가 아닌 우리의 태극기가 붙어 있다. 오늘은 베를린의 기미가요가 아닌 자랑스러운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오늘 드디어 56년 동안 맺혔던 한이 풀렸다. 영조가 내 국적을 찾아 주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 올림픽 박물관의 손기정 사진
일본 올림픽 박물관의 손기정 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7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소재 일본 올림픽 박물관의 일본의 금메달리스트를 소개하는 코너에 손기정의 사진과 이름이 전시돼 있다.
조선인이라는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sewonlee@yna.co.kr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고개를 떨군 손기정은 며칠 후 난생처음 태극기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금메달을 따고 귀국하기 전 독일에 머물던 중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의 집을 방문해 태극기를 처음 본 것이다.

손기정은 감전된 것처럼 온몸에 뜨거운 것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고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타국에서 태극기를 고이 간직하고 사는 안봉근의 모습을 본 것을 계기로 손기정은 외국에서 사인을 요청받으면 한글로 손기정이, 영어로 '코리아'(KOREA)라고 쓴 것으로 전해진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선에 진입하는 손기정.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선에 진입하는 손기정.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국적을 찾는 작업은 미완이다.

1970년 8월 15일 박영록(1922∼2019) 당시 신민당 의원이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가서 끌과 정으로 손기정의 국적 표기 '일본'(JAPAN)을 밤새워 '한국'(KOREA)으로 고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식 절차를 밟은 것이 아니라서 당시 서독 측이 이를 다시 일본으로 바꿔놓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홈페이지에는 손기정의 이름이 일본식 발음인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소속이 일본으로 표기돼 있다.

하지만 IOC는 당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이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는 설명을 달고 손기정(Sohn Kee-chung)이라고 한국 이름을 함께 소개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왼쪽) 선수를 격려하는 손기정(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왼쪽) 선수를 격려하는 손기정(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 측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도쿄에 설치된 일본 올림픽 박물관에 손기정의 사진과 이름이 남아 있으나 그가 조선 출신이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는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손기정(왼쪽)과 어니스트 하퍼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손기정(왼쪽)과 어니스트 하퍼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또 손기정과 남승룡의 이름이 일본대표선수단 명단에 별다른 설명 없이 다른 일본인과 함께 기재돼 있어서 이들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것을 역사를 모르는 방문객이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7일 일본 도쿄도 소재 일본 올림픽 박물관의 역대 일본 국가대표 명단에 한자로 손기정과 남승룡이 기재돼 있다. 조선인이라는 표기가 없다.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7일 일본 도쿄도 소재 일본 올림픽 박물관의 역대 일본 국가대표 명단에 한자로 손기정과 남승룡이 기재돼 있다. 조선인이라는 표기가 없다.

일본올림픽위원회(JOC) 홈페이지의 '일본대표선수 입상자 일람'에는 마라톤 금메달 수상자 항목에 한자로 '孫 基禎'(손기정)이라고 기재했다.

여기에는 조선 출신이라는 점이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JOC 홈페이지의 올림픽 역사를 소개 코너에서는 1936년 베를린 대회에 관해 "당시 일본 점령하에 있어 일본 대표로서 출장한 조선 출신의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했다고 설명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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