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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에게 사무실 에어컨 바람이 추운 이유

송고시간2020-07-15 09:42

젠더 데이터 공백 분석한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 출간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왜 유독 여자들에게 여름철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이 춥게 느껴질까. 일부 국가에서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든 이후 화장실 앞의 여자들이 선 줄이 더 길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여자가 죽거나 다칠 확률이 더 클까.

영국의 언론인이자 여성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가 쓴 '보이지 않는 여자들(원제 Invisible Women·웅진지식하우스)'은 이 세상에서 여자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여자에 관한 데이터의 공백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경우 여자는 데이터 작성 때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여자들은 불편하고 가난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부터 줄곧 사람은 남자와 동일시됐다고 말한다. 영어의 'man'과 같이 인도유럽어 계통에서는 '남자'를 뜻하는 말이 동시에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이란 으레 남자라고 여기다 보니 세상의 절반인 여자에 관한 정보는 공백일 수밖에 없다. 근로시간에 관한 데이터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무급 노동의 75%를 담당한다. 여자의 일일 무급 노동 시간이 3~6시간인 데 비해 남자는 평균 30분~2시간이다. 호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싱글 남성과 싱글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 비슷했다. 여자가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하자 여자의 가사 노동 시간은 증가하고 남자의 가사 노동 시간은 감소했다. 취업 여부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주로 여성들이 담당하는 무급 노동은 공식 통계로 잡히지도 않고, 따라서 정책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여름철 사무실
여름철 사무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특히 자녀를 둔 여성 직장인이 2차, 3차로 이어지는 회식 자리를 불편해 하는 것도, 파트 타임 일자리에서 여성의 비중이 높은 것도, 여성의 직장 근속 기간이 짧은 것도,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낮은 것도 이로써 상당 부분 설명이 된다. 여자들이 의욕이 없거나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들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8시간이라 할지라도 집안일, 육아와 같은 무급 노동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더 길게 일하는 것이다.

이 같은 '보이지 않는 노동'은 여성의 건강과 목숨을 위협한다. 영국에서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주당 55시간 넘게 일하는 여자는 우울과 불안이 생길 확률이 현저히 높았으나 남자의 경우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주당 41~45시간만 일해도 여자는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길 위험성이 증가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유급 노동 시간이 끝나도 무급 노동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 의무가 없는' 집단에서는 남녀 차이가 없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심장 수술 예후가 나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지만 2016년에 캐나다에서 한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학자들도 여성의 돌봄노동 부담이 이 차이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논문의 저자는 "관상동맥우회수술을 받은 여자들은 곧바로 돌봄노동에 복귀하는 경향이 있으나 남자들은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한다.

남성을 '디폴트'로 삼는 관행에서 비롯되는 데이터 공백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여성들의 건강과 목숨을 위협한다. 여자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자보다 47% 높고, 경상을 입을 확률은 71% 높다. 저자는 여자가 사고에 더 많이 노출되는 이유는 남자 중심의 자동차 설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동차 충돌 시험에 사용되는 인형은 평균적인 남성을 기준으로 제작됐다. 최근 들어서야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 인형이 사용되고 있으나 여성의 신체에 관한 정확한 데이터를 반영하지 않고 남성 인형에서 크기만 줄인 형태여서 여성 사고 예방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동차 충돌 실험
자동차 충돌 실험

[연합뉴스 자료사진]

또 2007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약리학 논문의 90%가 수컷만을 시험한 결과를 토대로 했다. 2014년의 다른 논문에서는 동물시험의 22%가 성별을 명시하지 않았으며, 명시한 시험의 80%는 수컷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70% 높은데도 뇌질환에 관한 동물 시험은 수컷을 대상으로 한 것이 5배나 더 많다. 이러다 보니 의사들의 처방과 치료법은 남성에게만 적합하고 여성에게는 오히려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 각국에서 심장병 예방약으로 자주 처방되는 스타틴은 거의 남성 피험자만을 대상으로 시험 돼 왔으나 최근 호주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 스타틴을 고용량으로 복용하는 여성은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뇨병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심혈관질환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으니 심장병을 예방해야 할 약이 오히려 심장병을 재촉하는 셈이 된다.

저자는 기술과 노동, 의료, 도시계획, 경제, 정치, 재난 상황 등 16개 영역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여성에 관한 데이터의 공백으로 초래된 갖가지 문제를 드러내 보인다. 최신 스마트폰은 액정의 크기가 6인치(152.4㎜)여서 평균 뼘이 18~20㎝인 여성들이 한 손으로 조작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피아노 표준 건반은 한 옥타브가 18.8㎝여서 역시 여자가 불리하다. 여자 피아니스트가 남자보다 통증이나 부상에 시달릴 확률이 50% 이상 높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표준 사무실 온도를 결정하는 공식은 몸무게 70㎏인 40세 남성의 기초대사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적정한 온도보다 평균 5도가 낮다. 심지어 구글의 음성 인식 시스템은 여성보다 남성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가능성이 70%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차별이나 여성의 불이익을 시정하기 위해 '성 중립'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잘못된 접근 방법과 데이터의 곡해 또는 부재로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화장실 면적이 같더라도 언제나 여자 화장실의 줄이 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서 화장실의 성별 구분을 없애고 '소변기 있는 화장실'과 '칸막이 있는 화장실'로만 표기되는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든 결과 여자들의 줄은 더 길어졌다. '소변기 있는 화장실'에는 남자만 들어가고 '칸막이 있는 화장실'에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줄을 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생리적으로 화장실 사용 시간이 길고 화장실에 더 자주 갈 수밖에 없는 여성의 특성을 고려해 기존의 여자 화장실은 그대로 두고 남자 화장실만 '성 중립 화장실'로 바꾸는 것이 제대로 된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성별 데이터 또는 젠더 데이터의 공백에 대한 저자의 해법은 간단하다. 여성 진출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의사결정 과정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자들은 여자를 잊지 않는다. 여성의 참여가 늘면 여성의 삶과 관점이 빛 속으로 나오게 되며 이는 세계 곳곳의 여자들에게도 이롭지만, 인류 전체에도 이로울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황가한 옮김. 464쪽. 1만8천500원.

cwhyna@yna.co.kr

여자들에게 사무실 에어컨 바람이 추운 이유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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