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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최대 격전지 '백마고지'서 생환한 노병의 증언

송고시간2020-06-17 07:01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산화한 전우…소대장만 4명이나 바뀌어"

6·25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열흘간 12차례 쟁탈전 끝 고지 수성

6.25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장원탁(89)옹
6.25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장원탁(89)옹

[촬영 양지웅]

(춘천=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다친 소대장을 내가 업고 냅다 뛰었는데 근처에 포탄이 또 떨어지더라고. 그 파편에 소대장은 엉덩이를 또 다쳤지.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야. 부분대장은 그냥 날아갔어. 방탄조끼만 남아있더라고. 비명횡사한 거지…"

눈가에 주름이 깊은 노병은 입대 연도도 또렷이 말하기 힘들 정도로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전투 당시 참상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얘기했다.

노병의 이름은 장원탁,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살이 됐다.

장 할아버지는 육군 2사단 31연대 수색대에서 근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창 화폐개혁을 할 때 군에 자원했다고 했다. 때는 1952년, 6·25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했다고 알려진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난 해였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백마고지 전투전적지
백마고지 전투전적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백마고지 전투는 6·25 당시 휴전회담이 난항을 겪던 1952년 10월 6∼15일 철원 북쪽 백마고지를 확보하던 국군이 중공군의 맹렬한 공세에 맞서 열흘가량 혈전을 펼친 끝에 방어에 성공한 전투다.

당시 고지 주인이 일곱 번이나 바뀌어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철원 일대는 인근의 평강, 김화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면서 유엔군과 중공군, 인민군이 대치한 상태였다.

철원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로 중공군이 노리기 적격인 장소였다.

당시 장 할아버지는 하사관학교 186기로서 4주 동안 훈련을 받은 뒤 하사(지금의 상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하게 됐다.

"밤이 지독하게 밝았어.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았지. 쉴새 없이 조명탄이 터졌고, 서치라이트도 주요 도로를 환하게 비췄지."

장 할아버지는 처음 백마고지에 도착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백마고지 바라보는 노병
백마고지 바라보는 노병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31연대 수색병으로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적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화기를 사용하는지 등을 수색·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 중 고지 주인이 워낙 자주 바뀌었기에 그만큼 수색 임무도 잦았다.

당시 소대는 전초(GOP)로 향하는 길을 아군만 알 수 있도록 갈지(之)자 모양으로 내고 주변에는 지뢰를 잔뜩 심었다.

이에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전초로 접근하다가 지뢰에 많이 죽었다고 했다.

장 할아버지는 전장을 떠올리며 "지독하게 싸웠다"고 다시 말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은 21만발, 중공군은 5만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었다. 6·25 전쟁 중 단일 전투로는 포탄을 가장 많이 소비한 전투다.

국군은 1개 사단으로 3개 사단을 상대해야 하는 병력 열세에 맞서 포탄을 4배가량 더 퍼부어댄 것이다.

고지 쟁탈전의 함성에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니 귀는 항상 멍한 상태였다.

그는 "건너편 산 너머로 중공군이 피리를 불며 쏟아져 나올 때는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고 말했다.

6·25전쟁
6·25전쟁

[연합뉴스 자료사진]

포탄은 종종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성이 오씨였던 부분대장은 중공군의 폭탄에 입고 있던 방탄조끼만 남을 정도로 처참하게 산화했다.

또 한 병사는 수류탄을 던지려다가 팔에 총격을 당했다. 수류탄은 아군 참호로 떨어졌고 27명 중 12명만 살아남았다.

당시 진지 근처에는 미군이 지은 관측소가 있었다. 중공군이 그곳을 차지하자 소대에서는 이를 되찾고자 지원자를 찾았다.

그때 장 할아버지를 비롯한 대부분 병력이 지원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공군을 소탕하고 관측소를 다시 점령했다.

장 할아버지는 "아군 포탄과 중공군 포탄이 정신없이 쏟아지는데 소대장을 업고 소총까지 3자루를 메고 둑을 넘었다"며 "근처에 포가 떨어져서 파편이 소대장 엉덩이에 박혔다"고 회상했다.

그는 "전투 당시 소대장만 4명을 갈아치웠다"며 "숱한 전우들의 죽음 속에서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6·25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장원탁(89)옹
6·25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장원탁(89)옹

[촬영 양지웅]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 아침 중공군 제38군의 선제공격으로 개시됐다.

모든 지역에 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병력을 교대시키며 집중 공세를 퍼부었지만 고지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나흘간 이어진 격전 끝에 15일 국군은 마침내 고지 탈환에 성공했고, 기세를 몰아 고지 북쪽 낙타능선까지 탈환하면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게 됐다.

결국 국군 제9사단은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해 고지 주인이 7회나 바뀔 정도의 혈전을 벌인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 제38군은 1만3천여 명의 사상자를, 국군 제9사단은 총 3천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됐다.

장 할아버지는 1957년 전역했다.

그는 "해마다 백마고지 전적비에 참배하는데 올해에도 갈 것"이라며 "젊어서 피땀 흘린 전장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밟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서북쪽 12㎞ 지점에 있다. 이곳은 현재 군사분계선 남방 비무장지대(DMZ)로 민간인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백마고지 바라보는 노병
백마고지 바라보는 노병

[연합뉴스 자료사진]

y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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