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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목숨 바쳐 나라 지킨 경찰…전체 3분의1 사상

송고시간2020-06-15 07:01

한국전쟁 최초 전사자는 강릉 정동진 해안 경계 근무하던 전대욱 경사

경찰 1만7천여명 죽거나 다쳐…국민 목숨 구하고 적 사살·순직

작년 12월 6·25 전사자 영현 봉송하는 경찰 의장대
작년 12월 6·25 전사자 영현 봉송하는 경찰 의장대

[연합뉴스 자료 사진]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1950년 6월 25일 오전 3시께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등명해안 초소.

27세이던 강릉경찰서 소속 전대욱 경사는 한여름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 경계·정찰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수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북한군 945육전대(陸戰隊) 소속 발동선 30척과 어뢰정 4척이었다. 전 경사한테 발각된 북한군은 총을 쏴 그를 살해했다.

북한군은 이로부터 약 1시간 뒤인 오전 4시께 38선 모든 지역에 걸쳐 남침했다.

전 경사는 남북과 군경을 통틀어 6·25 한국전쟁 최초의 전사자로 기록에 남게 된다.

경찰은 군과 비교해 한국전쟁 활약상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당시 전체 경찰 3분의1에 해당하는 1만7천628명(전사 1만648명·부상 6천980명)이 죽거나 다칠 정도로 전쟁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용감하게 싸운 경찰의 전쟁영웅들을 소개한다.

◇ 빨치산 사령관 사살한 차일혁…화엄사 불태우라는 명령은 거부

경찰의 대표적인 전쟁영웅으로 꼽히는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항일 유격전을 벌였다. 광복 직후 귀국해 악명 높은 일본 형사 3명을 저격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격대를 자발적으로 조직해 북한군에 맞섰다. 경찰은 1950년 12월 그를 경감으로 특별채용해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장으로 임명했다.

차 대대장은 1951년 1월 빨치산 2천500여명이 정읍 일대를 포위하자 전투경찰 75명을 이끌고 발전소 탈환 작전에 나섰다. 그는 밤에 전조등을 켠 아군 차량을 반복적으로 운행해 많은 병력이 있는 것처럼 적을 속여 발전소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아군은 전북과 충남 일대에 전기를 지속해서 공급할 수 있었다.

차 대대장은 전쟁 와중에도 현명한 판단으로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냈다.

그는 1951년 5월 적들의 은신을 막기 위해 지리산 화엄사를 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지만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세우는 데는 천년도 부족하다"며 거부했다. 대신 사찰의 문짝만 떼어내도 적들이 숨을 수 없다며 문짝만을 소각했다.

그는 1953년 5월 총경으로 승진해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9월 지리산 반야봉 근처 전투에서 빨치산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휴전 후에는 치안 유지에 힘쓰면서 자선 활동까지 하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54년 충주경찰서장으로 발령받은 뒤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세워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1958년 공주경찰서장 재임 중 금강에서 가족과 물놀이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정부는 한국전쟁 활약 등을 높이 평가해 2011년 그를 경무관으로 특진시켰다.

차일혁 경무관
차일혁 경무관

[연합뉴스 자료 사진]

◇ "주민 버리고 철수할 수 없다"며 부대 만든 한정일 전 곡성서장

한정일 곡성경찰서장은 1915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이던 1936년 순사(현재 순경)로 경찰에 입문했다. 해방 후에는 1948년 보성경찰서장을 거쳐 1950년 곡성경찰서장에 임명됐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북한군에 밀린 국군은 경상도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군은 지리적으로 일본을 통한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기 쉬운 경남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어 전라도 지역에서는 경찰이 거의 전적으로 국민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는 전남의 경찰에게도 경남으로 퇴각하라고 명령했지만, 한 서장은 "주민을 버리고 철수할 수 없다"며 경찰관 등 520여명으로 '곡성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25일 곡성군에 있는 태안사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 태안사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 서장은 사흘 뒤 북한군 3명을 생포해 북한군 603기갑연대의 이동 경로를 파악, 매복 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매복해 있던 '곡성부대'는 북한군에 기습 공격을 가해 4시간이 넘는 격전 끝에 52명을 사살하고 트럭 4대를 포함한 군사 장비 70여 점을 노획했다. '곡성부대' 피해는 전사 1명·부상 5명에 그쳤다.

이후 '곡성부대'는 처절한 보복을 당하게 된다.

국군과 유엔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군은 '곡성부대' 섬멸을 목표로 태안사에 총공격을 퍼부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서장은 남은 대원들을 모아 유격전을 벌여 북한군에 꾸준한 피해를 안겼다.

그는 휴전 후인 1960년 경찰에서 퇴직했고, 1987년 숨졌다.

작년 6월 한정일 곡성경찰서장 동상 제막식
작년 6월 한정일 곡성경찰서장 동상 제막식

[연합뉴스 자료 사진]

◇ 23세의 조관묵 경위, 주민 2천여명 대피시키고 전사

조관묵 경위는 1927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1948년 순경으로 임용됐다. 그가 춘천경찰서에서 근무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후 경찰은 국군이 북진할 때 후방에 고립된 적을 토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춘천경찰서는 관내 남은 북한군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조 경위는 1950년 10월 춘천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양구 지역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양구는 11월 3일 북한군 10사단 소속 패잔병 4천여명의 습격을 받았다.

조 경위는 주민 2천여명을 대피시킨 뒤 야산에 임시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에 맞섰지만, 복부에 총을 맞고 동료 30여명과 함께 순직했다.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다.

조관묵 경위
조관묵 경위

[연합뉴스 자료 사진]

◇ 라희봉 경위, 공비 토벌 작전 투입돼 11명 사살…수류탄 맞고 사망

라희봉 경위는 1928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1949년 순경으로 채용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긴 북한군 패잔병들은 지리산, 덕유산 등으로 숨어들어 아군을 위협했다. 이에 국군과 경찰은 합동으로 공비 토벌 작전을 벌였다. 1951년 1월 순창경찰서 쌍치지서장으로 부임한 라 경위도 이 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1951년 7월 의용대원을 이끌고 100여명의 북한군 공비 은거지를 공격해 9명을 사살했다. 10월에는 순창군 구림면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 2명을 사살하고 소총 3정을 노획했다.

1952년 11월 20일에는 순창군 쌍치면 뒷산에 공비가 침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경찰 100여명을 이끌고 수색 작전을 벌이다가 700여명의 적과 마주쳤다.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열세에 몰렸다. 적의 수류탄에 중상을 입은 라 경위는 3일 만에 사망했다.

라희봉 경위
라희봉 경위

[연합뉴스 자료 사진]

ksw0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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