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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뜨거운 오월의 광주 ①

항쟁의 불길 따라 걷는 오월길

(광주=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40년 전 폭력과 저항, 총격과 피로 물들었던 광주의 도심은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민주화 항쟁의 마지막 격전지 옛 전남도청을 둘러싼 구도심을 오래 걸었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미디어아트 '다시 태어나는 오월'(이이남) [사진/한미희 기자]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전시된 미디어아트 '다시 태어나는 오월'(이이남) [사진/한미희 기자]

광주의 거리에 섰다. 4월의 따뜻한 햇볕 아래서 나무는 보송보송한 새잎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한여름보다 뜨거웠던 5월을 앞둔 거리는 한산했다.

시민사회단체가 준비해 왔던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행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모두 취소된 터였다. 아시아문화전당도, 5·18민주화운동 기록관도 모두 기약 없는 휴관에 들어갔다.

'오월길'을 걷기로 했다. 민주화운동 사적지와 문화관광자원을 이어 5개 테마, 18개 코스로 조성한 도보 여행길이다. 그 중 첫 번째인 오월인권길 횃불코스는 5·18 민주화운동의 최초 발원지인 전남대학교에서 시작해 시민군의 마지막 결사 항전지인 옛 전남도청까지 이어진다.

'오월길'이 시작되는 전남대 정문. 1980년 5월 민족민주화성회 때 찍힌 흑백 사진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오월길'이 시작되는 전남대 정문. 1980년 5월 민족민주화성회 때 찍힌 흑백 사진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항쟁의 시작, 전남대 정문

1979년 10월 군인 출신 독재자가 총에 맞아 숨지면서 유신독재가 끝나는 듯했지만, 독재를 떠받치던 군부 안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같은 해 12월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내각 장악에 나섰고, 대학생들의 학원민주화 투쟁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정치투쟁으로 발전했다.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요구에 국회에서도 계엄 해제안을 처리할 가능성이 커졌다.

위기에 몰린 신군부의 요구에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자정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신군부는 전국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했고,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된 것은 시위진압 훈련에만 몰두해 온 공수부대였다.

일요일 아침부터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온 학생들과 '휴교령이 내리면 다음 날 아침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나온 학생 수백명이 정문에 모여 외친 구호와 노래가 5·18 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차도로 뻥 뚫린 정문보다는 오른쪽의 샛길로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삼삼오오 오갔다. 1980년 당시 원래의 정문 기둥 하나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5·18 민중항쟁 사적 1호를 알리는 타원형의 커다란 빗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5월 8∼14일 민족민주화성회 당시 학생들이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흑백사진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공수부대가 가차 없이 휘두르는 진압봉에 흩어졌던 학생들은 광주역 광장(사적 2호)에 다시 모여 전열을 가다듬고 도청으로 향했다. 광주역에서는 이틀 뒤인 20일 밤 이곳에 주둔했던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발포했다.

다음 날 아침 시신 두 구가 발견돼 도청 앞 광장으로 옮겨오면서,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시민들까지 동참하며 항쟁의 불길은 거세졌다. 광주역 광장 가운데 있던 분수대는 사라지고, '그때'를 목격했던 키 큰 소나무들이 총선 플래카드를 걸고 있었다.

5·18 민중항쟁 사적 2호를 알리는 광주역 광장의 빗돌 [사진/한미희 기자]
5·18 민중항쟁 사적 2호를 알리는 광주역 광장의 빗돌 [사진/한미희 기자]

◇ 금남로로 향해 가는 길

광주역 광장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대인교차로 방향으로 향했다. 4월의 햇볕도 제법 따가웠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목이 말랐다. 낮 최고 기온 25도를 기록했던 1980년의 그 날, 300∼400명의 학생이 계엄군에 쫓기며 외쳤던 구호가 텅 빈 거리에서 들리는 듯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대인교차로에서 롯데백화점과 광주은행이 있는 블록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사적 3호) 자리다. 5월 19일 전남 교통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계엄군은 대합실까지 난입해 총검을 휘둘렀고,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를 벗어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격한 참상을 알리면서 항쟁은 전남 지역 곳곳으로 확산했다.

교차로에서 제봉로를 따라가면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시민 학살에 항의하는 '죽음의 행진'에 참가했다가 내란수괴 혐의로 무기 징역을 받았던 고 홍남순 변호사 가옥(사적 29호)이 나온다.

왜곡 보도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로 불탔던 광주MBC 옛터(사적 7호), 투사회보를 만들었던 녹두서점 옛터(사적 8호)도 잇달아 만난다.

두 옛터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과거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고, 재야 민주인사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문건을 작성했던 홍 변호사의 단층 가옥은 보존 작업을 위해 가림막이 설치된 상태였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사적 3호)로 가는 대인교차로 지하도 [사진/한미희 기자]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사적 3호)로 가는 대인교차로 지하도 [사진/한미희 기자]

◇ 뜨거운 광장에 서서

녹두서점 옛터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아시아문화전당이다. 하늘마당과 예술극장을 지나 상무관(사적 5-3호) 앞에 멈췄다. 잔인하게 학살당한 시민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작은 두 손으로 아버지의 영정을 잡고 턱을 괴고 있던 다섯살 꼬마의 사진이 독일 슈피겔지에 실리면서 세계에 5·18을 알린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가 됐다.

죽음의 의미도, 슬픔의 감정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나이에 상복을 입은 채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많은 사람을 울렸다.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사적 5-1호)은 상무관 등과 함께 아시아문화전당의 민주평화교류원으로 남아있다.

재미 건축가 우규승은 아시아문화전당을 설계하면서 5·18의 역사성을 지키고자 옛 전남도청과 경찰청, 상무관 건물을 보존하고 나머지 신축 건물은 모두 지하로 내려보냈다.

지상에는 너른 광장과 공원이 만들어졌고, 지하 공간도 천창을 통해 빛이 들도록 해 '빛의 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다시 태어난 옛 전남도청 별관 [사진/한미희 기자]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다시 태어난 옛 전남도청 별관 [사진/한미희 기자]

상무관과 옛 전남도청 사이, 5·18 민주광장(사적 5-2호)에서는 부모와 함께 나온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의 남성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한 달 일찍 물을 뿜기 시작한 분수대를 몇 바퀴째 돌았다.

분수대 앞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돌아서면 오른쪽에 미색 외벽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전일빌딩(사적 28호)이 보인다. 금남로 1가 1번지에 들어선 이 빌딩에는 당시 언론사들이 입주해 있었고, 계엄군을 피해 달아나던 시민들이 몸을 숨기기도 했다.

새 주소가 금남로 245로 바뀌고,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명하는 탄흔 245개가 확인되면서 '전일빌딩245'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이후 탄흔 25개가 추가로 발견됐지만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5·18 기념공간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을 마친 전일빌딩245는 애초 지난 4월 초 문을 열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으로 개관일을 연기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하고 개관을 앞둔 전일빌딩245 외벽에 주황색 원으로 탄흔이 표시돼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하고 개관을 앞둔 전일빌딩245 외벽에 주황색 원으로 탄흔이 표시돼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세계유산이 된 5·18 기록물

전일빌딩245에서 시작되는 금남로(사적 4호)의 또 다른 이름은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명예도로로 지정됐다.

날마다 30여 만명의 광주 시민이 운집했던 항쟁의 거리를 알리는 사적비는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앞에 있다. 당시 가톨릭센터였던 이 건물 앞에서 18일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열렸고, 20일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여대의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기록관 역시 임시 휴관 중이지만, 취재 협조를 받아 들어갔다. 1∼3층 상설 전시실을 지나면서 총탄이 관통한 유리창부터 시작해 다양한 흑백 사진과 기록물로 당시의 참상을 다시 한번 직시했다.

'6·25 때보다 더했다'는 군인들의 만행 속에서도 평화 시위를 이어가고, 주먹밥을 나누고, 줄을 잇는 헌혈에 피가 남아도는 질서 있는 자치공동체를 이뤄낸 시민 정신이 더 위대하게 빛났다.

5·18 당시의 흑백 사진을 배경으로 거리에 흩어져 있는 주인 잃은 신발을 재현해 놨다. [사진/한미희 기자]
5·18 당시의 흑백 사진을 배경으로 거리에 흩어져 있는 주인 잃은 신발을 재현해 놨다. [사진/한미희 기자]

6층에는 당시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이 복원돼 있다. 금남로 옆 골목으로 난 창에는 '진실의 눈'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곳 6층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려다본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다"는 윤 대주교의 고백이었다.

윤 대주교는 조비오, 김성용 신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도록 했고, 이후 진상규명과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썼다.

오월길을 걷고 나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열여섯 중학생 동호가 금남로에서 친구가 총에 맞는 모습을 목격하고, 상무관에서 찢기고 터진 시신을 확인하고, 도청에서 쓰러지는 순간들이 영화보다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은 더욱 생생해서, 읽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된 무명씨의 글 '광주시민은 통곡하고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된 무명씨의 글 '광주시민은 통곡하고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05/10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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