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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도시, 섬들의 나라] ① 고대 아테네의 심장

그리스 아테네…'유럽의 시작' 아크로폴리스

(아테네=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움튼 이곳에는 번영했던 고대 문명이 흔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 위에 그림을 그리려면 상상력도 필요하다.

해 질 무렵 필로파포스 언덕 근처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정면에 파르테논 신전과 왼쪽에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아래쪽에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이 한눈에 보인다. [사진/한미희 기자]
해 질 무렵 필로파포스 언덕 근처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정면에 파르테논 신전과 왼쪽에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아래쪽에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이 한눈에 보인다. [사진/한미희 기자]

어릴 적 읽은 그리스 신화도, 대학에서 들었던 정치 철학 수업도 모두 가물가물한데 어쩌다 무턱대고 아테네에 내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 도시만큼 적확하게 적용되는 여행지가 또 있을까.

하지만 상상력을 뒷받침해줄 작은 기억도, 지식도 바닥이 뻔히 보였다. 이럴 땐 미련 없이 느슨한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가이드를 따라 고대 아테네의 심장으로 향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위해 지은 파르테논 신전 [사진/한미희 기자]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위해 지은 파르테논 신전 [사진/한미희 기자]

◇ 고대 아테네의 심장, 유럽의 시작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는 중심지의 가장 높은(acro) 곳에 '아크로폴리스'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도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이자 도시 방어를 위한 요새 역할을 했다.

아크로폴리스는 도시 국가마다 있었으니 보통명사지만 지금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면 당연히 파르테논이 있는 아테네의 언덕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테네를 두고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경쟁할 때 아테나는 올리브 나무를,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소금물을 제공했다. 건조하고 메마른 아테네 땅 곳곳에서 올리브 나무는 여전히 잘 자라고 있지만, 소금물은 쓸 데가 없으니 아테네인들은 아테나를 선택했다.

아테네가 가장 번영했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신, 제우스의 머리에서 갑옷을 입고 나온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를 위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신전을 지었다.

아테나가 여신이었기에 신전에 붙인 이름이 '처녀의 집'이란 뜻의 파르테논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2천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맥이 이어지고 있는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성인 남성만을 시민으로 인정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19세기도 끝나가는 1893년에야 뉴질랜드에서 처음 주어졌으니, 여성 배제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복원도 [게티이미지뱅크]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복원도 [게티이미지뱅크]

아침 일찍 지하철 아크로폴리 역에 모였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니 서두르는 게 좋다. 매표소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자니 바로 옆에 붙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 아테네의 심장인 아크로폴리스와 주변의 고고학 유적지는 민주주의와 철학, 연극, 과학, 예술이라는 유럽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등장한 곳'이며 '유럽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유럽연합의 유럽 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는 설명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적혀 있었다.

대문자와 느낌표로 강조한 마지막 문장은 '유럽이 여기에서 시작된다!'(EUROPE STARTS HERE!)였다. 앞의 두 문장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요약해 놓은 한 줄이었다. 아테네 고고학 여행에서 밑줄을 두 번, 세 번 긋고 별표까지 한 번 더 치고 시작할만한 문장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디오니소스 극장 [사진/한미희 기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디오니소스 극장 [사진/한미희 기자]

◇ 도시의 높은 곳으로

언덕을 올려다보니 성벽 위로 복원 공사 중인 파르테논이 보였다. 새파란 하늘 아래 파르테논을 올려다보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높이 156m의 바위 언덕은 서쪽 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절벽이다.

남쪽 기슭을 지나며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디오니소스 극장이다.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났다는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자 연극의 신이다.

아이스킬로스, 아리스토파네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이곳에서 초연됐다. 1만7천명을 수용했던 대극장은 현재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 일부가 남아 있고, 여전히 복원·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의 연극은 예술 활동만이 아니라 민주정치를 정착해 가는 과정의 산물이기도 했다.

연극을 통해 공동체의 화합과 인간의 평등을 이야기했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무대 앞 맨 앞줄 가장 좋은 자리에 놓인 등받이가 있는 의자다. 이것은 이후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별다른 음향 시설도 없는 이곳에서 그 많은 고대 아테네인들이 모여 나눴을 운명과 비극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는 매년 축제 때마다 공연이 열린다. [사진/한미희 기자]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는 매년 축제 때마다 공연이 열린다. [사진/한미희 기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나와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디오니소스 극장보다 훨씬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는 음악당이 나온다. 로마 시대인 161년, 대부호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를 기리며 만든 것이다.

195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쳐 지금까지 여름 축제 때마다 실제 공연이 열리는 곳이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3천석, 웅장해 보이는 이곳이 5천석이니, 1만7천석의 온전한 디오니소스 극장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프로필라이온의 기둥 하나가 어긋나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프로필라이온의 기둥 하나가 어긋나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전쟁이 남긴 흔적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에 깔린 대리석은 긴 세월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난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오르면 드디어 신전의 입구인 프로필라이온이 나온다.

덩그렇게 남은 대리석 기둥의 유난히 하얀 부분은 복원 과정에서 새로 끼워 맞춰 놓은 조각이다. 파르테논의 지붕은 전쟁으로 파괴된 것이지만, 프로필라이온의 지붕은 애초에 지어진 적이 없는 미완의 상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됐기 때문이니 어쨌든 둘 다 전쟁이 남긴 흔적이다.

프로필라이온 오른쪽에 튀어나와 있는 아테나 니케 신전은 정문보다도 작고 크게 눈에 띄지도 않지만, 아테네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지었기 때문이다.

'니케'가 승리의 여신 이름이기도 하지만, 니케 신이 아니라 승리를 가져오는 아테나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입구를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철골 구조물에 싸인 파르테논의 서쪽 뒷면이 보인다. 남쪽 면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주변에 흩어져 있는 대리석 파편들을 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정면. 유네스코의 로고가 이 모습을 본 따 만들어졌다. [사진/한미희 기자]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정면. 유네스코의 로고가 이 모습을 본 따 만들어졌다. [사진/한미희 기자]

지붕은 파괴되고 신전 안에 있던 거대한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을 지붕 아래 조각들도 사라졌지만, 지름 2m, 높이 10m의 대리석 기둥 46개가 둘러싼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신전은 정복자들이 누구냐에 따라 교회도 됐다가, 모스크가 되기도 했다. 어떤 정복자들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아꼈고, 때로는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신전이 결정적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것은 오스만 제국(터키)이 아테네를 점령했던 1687년이다. 오스만은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일 때 파르테논을 화약고로 사용했고, 베네치아의 포격을 받은 신전은 불이 붙어 화약이 폭발하면서 무너져내렸다.

19세기에는 오스만 정부에 파견된 영국 대사 엘긴이 페디먼트(박공벽 부분)와 메토프(페디먼트와 기둥 사이 외벽), 프리즈(안쪽 기둥 상단의 외벽) 등을 장식한 대리석 조각을 가져갔다.

수호신 아테나의 탄생부터 수호신 자리를 두고 벌인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싸움, 신들의 전쟁, 아테나를 기리는 종교의식이자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묘사한 이 대리석 조각들은 영국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파르테논 갤러리에서 '엘긴의 대리석'이라고 불리며 전시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보면 디오니소스 극장의 원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보면 디오니소스 극장의 원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도시의 높은 곳에서

요새 역할을 했던 아크로폴리스에서는 아테네 전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쪽 끝에서 내려다보면 디오니소스 극장 전체 모습을 그려볼 수 있고, 동쪽 끝 전망대에서는 파르테논 정면과 아크로폴리스 전경이, 뒤를 돌면 화가 난 아테나가 집어 던진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만들어졌다는 리카베투스 언덕이 보인다.

파르테논 북쪽으로 6개의 여인상 모조품이 돌기둥을 대신하고 있는 에레크테이온을 지나 다시 프로필라이온을 빠져나오면 작은 바위 언덕이 있다.

'아레스 신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법정이다. 아레스 신이 자신의 딸을 납치하려 했던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살해했는데,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신들의 법정에 고발했고, 신들은 이곳에 모여 재판을 했다고 한다.

이곳을 기독교 성지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바위 아래에 성경의 사도행전 구절이 새겨진 동판 때문이다. 해당 구절은 기독교 최초의 전도자로 알려진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한 설교 내용을 담고 있다.

바위 언덕에 서서 방금 내려온 아크로폴리스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고 반대편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면 고대 아테네인들이 민주정치를 펼친 인간의 땅, 아고라다.

아레오파고스에서 올려다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사진/한미희 기자]
아레오파고스에서 올려다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사진/한미희 기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02/08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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