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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그곳] '아이누의 땅'에서 불어온 그리움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잿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노인이 혼잣말을 한다. 나고 자란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어도 눈이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는걸까.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와 쥰이 다시 만났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와 쥰이 다시 만났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임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에서 윤희(김희애 분)의 첫사랑인 쥰(나카무라 유코 분)의 고모 마사코는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계속한다. 영화는 왜 이 말을 반복하고 있는걸까.

쥰과 마사코가 사는 곳은 일본 북단의 섬 홋카이도(北海道) 오타루다. 홋카이도는 연평균 강설량이 4∼6m에 이르는 설국이다. 10월 말부터 눈이 내린다. 한겨울 오타루의 거리에선 어른 키 높이만큼 쌓인 눈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무섭게 쌓여가는데 그칠 기미조차 없는 눈. 자연의 뜻은 인간이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윤희에게'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혼해서 중학생 딸 새봄이를 키우며 사는 윤희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추억을 갖고 있다. 그리움은 커져 가지만 잊고 살아야 하는 윤희의 삶은 윤기 없이 건조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쥰이 혼자 써놓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를 고모인 마사코가 몰래 부치고, 우연히 편지를 읽은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를 위해 일본 여행을 제안한다.

새봄과 남자친구 경수는 윤희가 첫사랑과 재회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새봄과 남자친구 경수는 윤희가 첫사랑과 재회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첫사랑과의 재회는 옛 추억만큼이나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첫사랑은 대상이 누구이든 그때의 섬세하게 직조된 감정을 우리는 '숭고'(崇高)라고 감히 표현한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 떠올라 먼지가 쌓인 책을 꺼내 봤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머리를 베개에 얹었다. 격한 몸놀림으로 인해 나를 가득 채운 감정들이 흔들리기라도 할까 봐…'라는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첫사랑의 열병이란 이런 거지'라고 느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세상이 마냥 커 보이기만 하던, 모르는 게 더 많고,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던 그 시절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의 가슴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꿈은 얼마 안 가 산산조각이 날지라도 그때만큼은 상대를 그야말로 '숭배'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호흡했던 공기마저도 신성하게 느껴지는 작열감.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한, 평생 몇 번 가지기 힘든 젊음의 자기 존재 증명 방식임이 틀림없다.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야경. 10월 말부터 눈이 내리는 오타루는 연평균 강설량이 4∼6m에 이르는 설국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야경. 10월 말부터 눈이 내리는 오타루는 연평균 강설량이 4∼6m에 이르는 설국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사라진 사람들의 땅' 홋카이도

첫사랑과 결합한 오타루의 '설국' 이미지가 마냥 로맨틱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홋카이도는 일본 식민주의가 싹을 틔운 곳이다. 근대국가 성립 이전에 홋카이도는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던 원시의 땅이었다. 그곳엔 '인간'이란 뜻의 아이누인들이 살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첫 번째 식민지로 홋카이도 경영에 나선다. 홋카이도라는 '내적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원대한 야망을 실습하고 구체화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는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만주로 침략지를 넓혀 나갔다. 아이누인들은 학살되고 강제이주 됐으며, 지금은 사실상 소멸했다.

일제는 홋카이도를 식민화하면서 그 노하우를 미국의 서부 개척 경험에서 빌려왔다. 그 경험을 전수하던 백인 중 식민학의 본산이던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 삿포로농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클라크 박사가 한 말을 우리는 기억한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구호다. 그가 강조한 야심은 다름 아닌 미개한 땅 홋카이도를 개척하라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의미했다.

윤희와 새봄 [리틀빅픽처스 제공]
윤희와 새봄 [리틀빅픽처스 제공]

우리는 당시 일제가 홋카이도를 개척하면서 광산촌에 반강제적으로 끌려와 혹독한 노동 끝에 죽어간 수많은 조선인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토록 억압받고 수탈당한 아이누인들과 조선인들에게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눈이 낭만이었을 리 없다. 피수탈자에게 눈은 제설이라는 노동의 부담을 부과하는 자연의 시련일 뿐이다.

매년 2월 초 열리는 삿포로 눈 축제는 동심을 부르는 꿈의 축제지만, 축제에 사용하는 눈을 실어 나르는 것이 삿포로에 주둔하는 자위대라는 이유로 축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 '그리움'에 대하여

윤희와 쥰은 오타루의 눈 쌓인 운하 시계탑에서 만난다. 두 사람의 눈에는 쌓인 눈만큼이나 깊은 그리움이 묻어 있다.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이 토드 헤인즈의 영화 '캐롤'에서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가 보여준 섬광 같은 사랑의 눈빛을 떠올렸을 것이다.

눈빛은 때로 다른 모든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오직 그 눈빛만이 의미라고 강변한다. 윤희와 쥰도 그에 못지않은 그리움의 심연을 연출했다.

이쯤 해서 마사코의 그 수수께끼 같은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는 '그리움은 언제까지 계속되려나'로 마술 같은 변신을 이행한다. 쌓인 눈은 바로 그리움이라고.

쥰은 윤희에게 보내는 편지에 "뭐든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잖아"라고 쓴다.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쌓여버린 그리움. 이제 눈은 그쳤다.

윤희의 오래된 필름카메라. 새봄은 엄마 윤희가 준 필름카메라로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며 윤희의 웃음을 담는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윤희의 오래된 필름카메라. 새봄은 엄마 윤희가 준 필름카메라로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며 윤희의 웃음을 담는다. [리틀빅픽처스 제공]

'윤희에게'가 퀴어 무비라는 사실을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또 특이하게도 세대를 역류하는 동성애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부모가 자식의 동성애를 인지하고 거부감을 갖게 되는 일반적 서사에서 벗어나 딸이 엄마의 동성애를 인지하고 이를 응원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동성애는 그래서 더더욱 노출되기를 꺼린다. 본인과 주변 모두, 통념상의 금기와 억압에 감정과 현실은 숨겨지고 덮인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눈이 쌓여 대지를 뒤덮어도 언젠가는 녹아 만물을 드러내듯 감정은 온전히 숨겨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우리는 공감한다. 상대가 이성이냐 동성이냐는 부차적이다. 늘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라고 자문하는 건,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희미한 원망이나 탄식처럼 들린다.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의 미완성 시구는 그리움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을 준다. 어찌 됐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리틀빅픽처스 제공]
[리틀빅픽처스 제공]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faith@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01/15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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