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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넘어간 김원봉, 행정관료로 전락해 입지 상실"

송고시간2019-12-08 09:44

김광운 국편 편사연구관, 북한 사료로 약산 행적 분석

약산 김원봉
약산 김원봉

[한길사 제공,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월북한 정치인인 약산(若山) 김원봉이 북한에서 행정관료로 전락해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서 쌓아온 자신의 입지를 잃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겸 북한대학원대 디지털자료센터장은 독립기념관이 발간하는 계간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최신호에 실은 논문 '김원봉의 1945년 광복 이후 정치 행적과 성격'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김 연구관은 연구 배경에 대해 "김원봉의 독립운동 활동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충분히 알려졌으며, 역사적 평가와 관련한 논란이 거의 없다"며 "그런데 해방 이후 정치활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음에도 평가를 둘러싸고 '절대 부정'과 '무조건 긍정'이 부딪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1948년 4월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전언(傳言), 전문(傳文)에 근거했기 때문에 문헌 자료 등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관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정치 행위가 권력 쟁취를 위해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활동의 연속이었다고 강조했다.

김원봉은 1945년 12월 '임정 요인' 2진으로서 군산 비행장을 통해 귀국했으나, 완전한 주권 회복은 미뤄지고 국토는 분단될 위기에 있었다. 약산은 김성숙, 조소앙 등과 함께 남북을 망라하는 최고기관 설립을 꿈꿨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자주성과 민족 단합이라는 이념을 견지한 김원봉은 이승만을 비판했고,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이후 북한에 남았다.

김 연구관은 '노동신문' 등 사료를 바탕으로 "1948년 9월 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원봉은 초대 내각 국가검열상에 이름을 올렸다"며 "이후에는 국가검열상 또는 인민공화당 위원장 직함으로 활동했고, 남조선 민전 의장으로서도 인민정권 강화와 '국토완정'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했다.

김원봉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선거'에서 위원으로 선출됐고, 1951년 5월에는 김일성으로부터 평안북도에서 파종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이유로 축전을 받았다.

이어 1952년 3월에는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아 서훈됐고, 그해 5월에는 노동상에 임명됐다. 1953년 정전 무렵에는 휴전을 위한 북한 제의를 미국에 전했고, 중국과 소련에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요구하고 미국과 남한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김 연구관은 1955년 무렵을 김원봉 활동 변곡점으로 보면서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임정 요인들은 북한 당국의 대남 평화 공세에 크게 자극받아 혁명적 민족세력의 정치조직체 결성을 모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원봉은 평양에서 관리자이자 관료로 살았고, 정치 활동가로서의 성격은 차츰 탈색했다"며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으로 함남 퇴조선거구에서 선출되면서 형식상 남한 정치활동가도 아니었고, 이후 삶은 의전 담당 고위직에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김원봉은 북한이 인민정권의 독재 기능을 강화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해 나아간 1958년에 불어 닥친 세대교체 과정에서 권력을 잃었다고 김 연구관은 부연했다. 북한에서 확인되는 김원봉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 참가였다.

김 연구관은 조선노동당이 북한 사회 영역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면서 김원봉이 설 자리를 잃었다면서 "김원봉은 이미 만들어진 북조선 질서의 정당화에 복무하며 자신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잃었고, 결국 행정 관료로 영락해 1950년대 후반 북한의 변화된 현실에서 입지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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