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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 조병창] ② 100세 바라보는 생존자 김우식 할아버지의 증언

17살에 들어가 3년여만에 탈출…"해방 후 거의 다 죽고 남은 건 나뿐"
"좋은 곳이라는 말에 간 일본육군 조병창…해 뜨기 전 나가 종일 노동"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 김우식씨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피해자 김우식씨(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인 김우식(95)씨가 3일 충남 청양 자택에서 조병창에서의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2019.12.3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1만여명 가운데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나이는 어느덧 100세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우리의 무관심 속에 생존자를 찾는 것도 힘들지만 찾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건강이 악화해 일제 침탈의 역사를 제대로 증언할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상의 인천대 교수가 2017년 7∼8월 두 달 간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 12명을 찾아내 구술자료를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 교수는 지영례(92) 할머니 등 생존자들이 있지만 기억력이 사라졌고 지병이 있거나 연락이 닿지 않아 당시를 회고할 수 있는 생존자는 찾기 힘들다고 했다,

연합뉴스는 이 교수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생존자를 소개받았다. 김우식(95) 할아버지는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생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충남 청양 자택에서 만난 백발의 김우식 할아버지는 78년 전 찍은 흑백 사진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힘겹게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다.

흑백 사진 속의 김우식 할아버지는 머리에 모자를 눌러 쓴 17살 소년의 앳된 모습이었다. 차렷 자세로 선 그의 옆에는 조병창 동료들과 일본인 간부가 서 있었다.

김씨는 "17살 때 처음 조병창에 들어갔더니 양성소에 가야 한다고 해서 3개월 교육을 받고 공장에 배치됐다"며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봉급을 줬다"고 떠올렸다.

1941년 봄 조병창에서 일하던 사진사로부터 '좋은 데서 사람을 모으고 있다'는 말에 무작정 갔다가 덜컥 들어가게 된 무기 제조공장이었다.

간단한 기술을 배우는 기능자 양성소에서 3개월 동안 지낸 김씨는 2공장에 배치돼 온종일 소총 방아쇠를 깎는 일을 했다.

1공장에서는 쇳물을 붓는 주물 작업을, 3공장에서는 조립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하루에 생산해야 하는 총기의 양이 정해져 있어 해가 뜨기 전 공장에 나가 종일 노역에 시달리고 해가 지면 숙소로 돌아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혹여 불량품이 나오면 검사공에게 혼쭐이 났다.

잠은 부평 백마정에 있는 사택에서 자야 했다. 일본인들이 묵는 숙소와 완전히 분리돼 있어 조선인들만 거주하는 곳이었다.

일본육군 조병창에서 찍은 흑백사진 바라보는 김우식 씨
일본육군 조병창에서 찍은 흑백사진 바라보는 김우식 씨(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인 김우식(95)씨가 충남 청양 자택에서 조병창 시절 찍은 자신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2019.12.3

헌병대의 삼엄한 감시 속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다음 날 새벽까지 잔업을 하는 일도 잦았다. 드넓은 공장이었지만 구경은 꿈도 못 꿨다.

김씨는 "일요일은 쉬게 돼 있는데 이것도 대중이 없었다"며 "숙소와 공장만 오갔으며 맘대로 그만둘 수가 없으니 그게 문제였다"고 토로했다.

이어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지 딱 방아쇠 깎는 한 가지 일만 하게 했다"며 "까딱 잘못하면 헌병대에게 붙잡혀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공장 내 작업반장과 부반장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그 아래 노동자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갔지만, 봉급도 음식도 변변찮았고 날마다 배식되는 밥은 성장기 청소년에게 턱없이 부족해 늘 배를 곯았다.

음식을 훔쳐 먹다가 크게 혼나기도 부지기수였다. 죽지 않을 만치 주던 돈은 몰래 떡을 사 먹는 데 썼다.

김씨는 "그땐 뭐 불만이란 것도 모르고 마땅한 직장도 없고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면서도 "자꾸 집이 너무 그리워 무작정 도주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 김우식씨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 김우식씨(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인 김우식(95)씨가 3일 충남 청양 자택에서 조병창에서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2019.12.3

늘 도망칠 기회를 엿보던 그는 조병창에 처음 들어간 지 3년이 훌쩍 지난 1944년 어느 겨울 무단결근을 하고 도주의 길에 올랐다.

혹여나 헌병대에 잡힐까 두려워 부평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기차를 잡아타고 다시 환승해 충남 집으로 향했다.

보름도 되지 않아 지서에서 지명 수배가 내려왔지만, 5대 독자의 체포만은 막으려던 부모님의 임기응변으로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

귀한 닭이며 계란을 지서에 갖다 바쳤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에게는 조병창 대신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간 곳이 평양군무예비훈련소였다. 수도도 나오지 않아 대동강 물을 떠다 쓰고 지붕 시래기로 국을 끓여 먹는 열악한 상황에 그는 단식을 계속했다.

김씨는 "내가 곧 죽을 거 같으니까 18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더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있을 때 해방이 됐는데 말해 뭐하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조병창에 국민학교 동창생이랑 해서 같이 있던 사람이 한 4명 됐는데 지금은 다 죽었다"며 "남은 건 나밖에 없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일본육군 조병창 노동자였던 김우식씨와 아내 이금예씨
일본육군 조병창 노동자였던 김우식씨와 아내 이금예씨(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인 김우식(95)씨와 아내 이금예(93)씨가 3일 충남 청양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2019.12.3

이후 김씨는 철도경찰 시험에 합격해 경찰로 일하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란에 휩쓸렸다.

경주와 대구를 거쳐 조치원에 배치를 받았지만 1·4 후퇴 때 큰아들을 낳은 아내를 데리고 피란 생활까지 해야 했다.

격랑의 세월을 견디고 아내 이금예(93)씨와 슬하에 아들 다섯에 딸 하나를 둔 김씨는 옛 기억을 다 끄집어내자 홀가분해진 듯했다.

그러나 훗날 일본육군 조병창이 민간에 다시 개방될 수도 있다는 말에 김씨는 "해방 이후 조병창을 그냥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폐허가 되다시피 해서 공장도 다 비고 살던 집도 사는 사람도 없고…다시는 그 건물을 보고 싶지 않다"고 손을 내저었다.

해방 후 일본육군 조병창은 미군이 그대로 인수해 아직도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안에 미공개 상태로 남아 있다.

국방부는 다이옥신류 등에 오염된 '캠프마켓' 토양을 정화한 뒤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캠프마켓 44만5천여㎡를 인천시에 반환할 예정이다.

chams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12/10 07:1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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