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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순직기자 1호 장덕준이 요즘 기자였다면

우리나라 근대언론사에서 최초의 순직기자로 기록된 장덕준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우리나라 근대언론사에서 최초의 순직기자로 기록된 장덕준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대한민국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은 중국 간도 침입의 구실을 만들고자 마적단 두목 창장하오(長江好)를 매수했다. 그해 10월 2일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 400여 명이 지린(吉林)성 훈춘(琿春)을 습격해 일본영사관을 불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3개 사단을 파병해 마구잡이로 한국인을 붙잡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 훈춘사건으로 학살된 한국인은 5천 명이 넘는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정간 조치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조사부장과 통신부장을 겸하고 있던 장덕준은 "비록 당장 보도할 지면이 없더라도 기자의 취재 활동을 중단할 수 없다. 다수의 동포가 학살당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현장으로 향했다. 10월 15일 서울을 출발해 11월 6일 간도에 도착했다.

장덕준 선생이 순직하기 3개월여 전의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장덕준 선생이 순직하기 3개월여 전의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그는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냐고 쫓아와 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 이 기사는 한참 뒤인 1925년 8월 29일자 지면에 실린다. 그는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고 한국인을 상대로 강연하던 중 11월 9일 아침 일본군의 호출을 받고 숙소에서 나간 뒤 종적이 끊겼다. 그의 당시 나이 28세였다. 동아일보는 정간이 해제된 이튿 날인 1921년 2월 22일 장덕준의 행방불명 사실을 지면으로 알렸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듬해 10월 28일자에서 "일본군이 유인해 암살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실종 10년 만인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며 장덕준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 추도식을 거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 순직이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에 기자협회 기장(紀章)을 제정하며 메달 뒷면에 장덕준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광복 이후 최초의 순직 종군기자 최병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광복 이후 최초의 순직 종군기자 최병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2. 중국과 대만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진먼다오(金門島)는 중국에서 볼 때는 눈엣가시였고 대만 처지에서는 본토 수복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1949년 10월 상륙작전을 펼쳤다가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은 절치부심 끝에 1958년 8월 23일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대만 국민당군도 적극 대응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에 출동시켜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나 이때도 중공군의 진먼다오 점령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진먼다오 포격 사건 때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이던 최병우 기자는 현장 취재를 위해 대만으로 향했다. 1958년 9월 11일 포탄이 쏟아지는 섬에 외국인 기자로는 유일하게 상륙했다가 지프 전복사고로다쳐 타이베이(臺北)로 후송됐다. 그러나 부상도 그의 취재 열정을 막지 못했다. 9월 26일 다시 상륙을 시도하다가 일본·대만 기자 5명과 함께 실종됐다. 당시 나이는 34세였다. 그때 살아남은 일본 기자는 "최병우 기자가 '우리 중 누가 살아남으면 이 사건을 꼭 알리자'라고 외친 뒤 파도에 휩쓸렸다"고 전했다.

광복 후 최초의 순직 종군기자인 최병우는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외국인 기자가 17명이나 되는데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없어 부끄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57년 창립된 언론인 모임 관훈클럽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관훈클럽은 그의 취재 정신을 기려 1989년 최병우기자기념국제보도상을 제정, 해마다 관훈언론상 시상식 때 국제뉴스 보도에서 공적이 뛰어난 언론인에게 시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 선양특파원으로 옌지 출장 중 순직한 조계창.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중국 선양특파원으로 옌지 출장 중 순직한 조계창. [연합뉴스 자료사진]

#3. 연합뉴스 기자 조계창은 2006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 선양(瀋陽)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랴오닝(遼寧)성 성도인 선양은 중국 동포의 집단 거주지이자 북한으로 열린 창이었다. 남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북한의 문이 활짝 열리는 날 걸어서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기자가 되고 싶다"며 선양 주재기자를 자원했다.

조 기자는 2008년 11월 27일 지린성으로 출장을 떠나 한반도 전문가들을 만나고 옌지(延吉)에서 김병민 옌볜(延邊)대 총장을 인터뷰했다. 12월 2일 아침 택시를 타고 투먼(圖們)으로 향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향년 36세로 숨졌다. 한국기자협회와 연합뉴스는 2010년 공동으로 조계창국제보도상을 제정해 해마다 한국기자상 시상식 때 상을 주고 있다.

아웅산 참사로 희생된 동아일보 이중현 기자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의 영현 안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웅산 참사로 희생된 동아일보 이중현 기자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의 영현 안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리나라 언론은 근대 이후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여러 순직자를 낳았다. 1960년 4월 19일 취재진을 차에 태우고 시위 현장을 달리다가 서울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 앞 사거리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은 조선일보 운전기사 조광집, 베트남전에 종군했다가 1966년 11월 28일 교통사고를 당한 동아일보 백광남,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소 폭탄 테러로 희생된 동아일보 사진기자 이중현, 1993년 해남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를 취재하고 광주로 귀사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무등일보 사진기자 박경완, 1997년 7월 5일 두만강 북·중 접경지역에서 취재하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이기혁, 2010년 8월 11일 부산 민락어촌계 방파제에서 태풍 뎬무 피해 현황을 취재하다가 파도에 휩쓸린 KNN 카메라기자 손명환 등도 취재 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광주전남지회는 2006년부터 박경완기자상을 시상하고 있다.

9일 장덕준 기자가 실종된 지 99주년을 맞는다. 올 연말과 내년 초에는 최병우기자기념국제보도상, 조계창국제보도상, 박경완기자상의 새로운 수상자가 탄생할 것이다. 기자 정신을 기리는 상이 늘어나도 언론은 불신의 아이콘으로 꼽힌 지 오래다. 이제는 기자가 개혁 대상을 넘어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로 불릴 정도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만일 장덕준을 비롯한 순직 언론인들이 요즘의 언론 현실을 본다면 어떤 심경일지 두렵고 참담하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순직기자 1호 장덕준이 요즘 기자였다면 - 6

heeyo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11/05 07: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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