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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그곳] 성수대교는 과연 복원됐나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영화 '벌새'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 1994년,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수대교 붕괴를 다룬 영화는 아니지만, 사고가 영화에 나오고 주요 인물 중 하나가 희생되기도 한다. 사고가 서사의 중요한 축이다. 그런데 왜 하필 1994년 성수대교일까.

영화 '벌새'의 스틸컷. 은희는 언니, 언니의 남자친구와 셋이서 새벽 시간 한강에 나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말없이 응시한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벌새'의 스틸컷. 은희는 언니, 언니의 남자친구와 셋이서 새벽 시간 한강에 나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말없이 응시한다. [엣나인필름 제공]

잘 만든 영화에선 시대의 공기가 감지된다. 아주 뚜렷하게. 1994년 서울 강남의 공기는 어땠을까.

주인공 은희(박지후 분)는 서울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 산다. 부모는 떡집을 운영하고, 오빠와 언니가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중생이다.

겉으로 보면 얼핏 강남에 사는 유복한 중산층 집 막내딸로 아픔도, 걱정도 없을 것 같지만, 은희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다.

오빠는 은희에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부모는 오빠를 꾸짖기는커녕 "싸우지 좀 마"라고 일방적 폭력을 남매간 사소한 갈등으로 간주한다.

아빠는 가부장적 권위에 젖어 아들만 바라보고, 가게 운영과 집안일을 도맡은 엄마는 은희와 대화할 여유가 없다.

학교에선 '날라리'라고 생각하는 친구 이름을 적어내게 하는 '투표'로 은희를 이미 날라리로 낙인찍었다.

그나마 소소한 기쁨을 주던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믿었던 친구는 배신한다. 은희를 좋아한다던 여자 후배는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며 등을 돌린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는 세상, 유일하게 은희에게 세상을 또박또박 얘기해주던 한문 선생님 영지마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무너진 성수대교와 함께.

'벌새' 스틸컷. 영화는 성수대교가 붕괴된 1994년, 중학교 2학년 여학생 은희의 이야기다. [엣나인필름 제공]
'벌새' 스틸컷. 영화는 성수대교가 붕괴된 1994년, 중학교 2학년 여학생 은희의 이야기다. [엣나인필름 제공]

"내 이야기"라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의 순전한 입소문만으로 이 독립영화는 어느새 관객 수 13만4천명(11월 4일 기준)을 넘어섰다. 그것은 아마도 아련한 회상의 힘보다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영화의 현재성 때문이리라.

1994년으로부터 25년이 흘렀지만 수많은 '은희들'은 그때를 돌아보며, 또 '지금의 나'에 몸서리치며 구원자로서 영지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또 갈망했을 것이다.

우리의 '은희들'이 겪는 이 모든 폭력적인 억압·좌절·갈등·단절·배신을 "그 나이 땐 다 그렇게 크는 거야"라는 성장통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그 소우주가 너무 위태롭고, 너무 소중하며, 그 세계가 짊어진 상처는 숱한 별들의 항로를 바꿀 정도로 깊지 않은가.

공부 못하는 은희를 향해 같은 반 급우는 "쟤는 커서 우리 집 파출부 될 거야"라고 무시한다. 남자 친구의 엄마는 은희를 보자 "얘가 방앗간 집 딸이지?"라고 내뱉는다.

은희처럼 오빠에게 맞고 사는 단짝 친구는 오빠에게 복수하는 자신의 상상을 말하며 "오빠의 폭력 때문에 죽는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고, 오빠가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을 보기 위해 하루 정도는 유령이 되어 가족들의 반응을 지켜본다.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후련하다"고 말한다.

무시와 차별과 분노가 담겼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대사는 몸서리쳐지게 익숙하고 잔인하다.

영화 '벌새'에서 은희가 단짝 친구 지숙과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벌새'에서 은희가 단짝 친구 지숙과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너희들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라는 학교 선생님의 비인간적 구호와 공포스런 말 대신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는지 기억해 보자.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집이 부자인 아이와 가난한 아이가 일찍부터 한 교실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 휴일 없이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며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젠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싸구려 구호조차 필요 없을지 모른다.

은희가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을 보내던 그해 10월 21일 아침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기술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디자인과 속도를 중시한 게르버 트러스(Gerber Trus) 공법을 미숙하게 적용했고 관리 감독은 소홀히 해 붕괴됐다고 한다.

법원은 대교 건설과 관리 등에 관여한 이들을 업무상과실치사 등의 공범으로 처벌했다.

다리는 오전 7시 40분께 10번과 11번 교각 사이 상판 48m 구간이 무너졌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16번 시내버스와 승용차 등 차량 6대가 한강으로 추락했다. 32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8명이 강남 집에서 강북 학교로 등교하던 무학여고 여고생이었다. 이 불운한 아이들은 왜 강남에서 강북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을까.

'벌새'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저녁, 은희의 가족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다. 은희의 언니는 이날 아침 지각을 해서 추락한 16번 버스를 타지 않았다. [엣나인필름 제공]
'벌새'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저녁, 은희의 가족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다. 은희의 언니는 이날 아침 지각을 해서 추락한 16번 버스를 타지 않았다. [엣나인필름 제공]

1970년대 유신의 깃발을 세운 군사 정권이 강남을 개발하면서 인구 유인책으로 썼던 게 강북 명문 고교들의 강남 이전이다.

경기고(1976), 휘문고(78년), 정신여고(78년), 서울고(80년), 숙명여고(80년), 중동고(84년), 경기여고(88년), 보성고(89년). 10여년 사이에 오랜 세월 강북에 터를 잡아 온 이름난 학교들이 하나둘씩 강을 건넜다.

많은 부모가 자녀들의 명문대 진학을 꿈꾸며 강남으로 이사했다. 자연히 인구도, 개발도 강남에 집중됐다. 강남 학군의 학교만으로는 학생들을 전부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번 버스에 탑승했다 사망한 여고생들은 강남 지역 학교에 배정되지 못해 강북으로 통학하던 학생들이다.

성수대교가 붕괴된 뒤 8개월 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2년 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20년 후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도 국가 권력은 무능했다.

강남 압구정동과 강북 성수동을 잇는 성수대교는 1997년 7월 상판, 트러스, 교각 등을 모두 교체하는 복구공사로 재개통됐다.

영화에서 은희는 소식이 끊긴 한문 선생님 영지의 집을 찾아간다.[엣나인필름 제공]
영화에서 은희는 소식이 끊긴 한문 선생님 영지의 집을 찾아간다.[엣나인필름 제공]

성수대교 붕괴로 영지 선생님을 잃은 은희는 사고로 학교 친구들을 잃은 언니와 언니 남자친구와 셋이서 새벽 시간 한강에 나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말없이 응시한다. 은희에게 대교의 붕괴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어림이라도 해보고 싶다.

그때 그리고 그 이후. 많은 '은희들'이 겪었던 그 수많은 소통·관계·인격·믿음의 붕괴에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고 있다.

조류 중 가장 작은 '벌새'의 어떤 종은 1초 동안 55회나 날개를 퍼덕인다고 한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외로울 때 제 만화를 보고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벌새의 날갯짓을 떠올리게 하는 은희의 이 물음이 희미한 슬픔으로 들려오는 지금, 붕괴된 성수대교는 과연 복원된 걸까.

1997년 7월 성수대교는 붕괴 참사 2년 8개월 만에 복구돼 재개통됐다. [연합뉴스 DB]
1997년 7월 성수대교는 붕괴 참사 2년 8개월 만에 복구돼 재개통됐다. [연합뉴스 DB]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faith@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11/12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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