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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 of Mongolia] ③ 대초원 오프로드

(할흐골[몽골]=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몽골의 최동단 도르노드주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대초원(Menen steppe)이 펼쳐져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곳의 주인은 몽골 영양을 비롯한 다양한 희귀 동식물이다.

대초원의 석양 [사진/한미희 기자]
대초원의 석양 [사진/한미희 기자]

◇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일

구릉도 나무도 없는 초원에서는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호남평야만 봐도 넓다고 감탄하는 서울시민에게는 눈으로 보고도 가늠이 되지 않는 압도적인 풍광이었다.

이 풍경이 카메라에는 어떻게 담길까 궁금해 버스 창밖으로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카메라는 초점을 맞출 피사체를 찾지 못하고 잠시 허공을 헤맸다.

인터넷이 끊겨 구글 지도는 무용지물이고 방향을 알 수 있는 건 오직 태양의 위치뿐인데, 그마저 구름에 가리면 내가 있는 곳도, 향해 가는 곳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대초원에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직선으로만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가던 앞차를 놓친 버스는 잠시 길을 잃었고, 해가 완전히 진 뒤에는 GPS에 의존해 가던 선두 차량마저 목적지를 지나쳐 헤매고 말았다.

웅덩이를 피해 달리는 버스 [사진/한미희 기자]
웅덩이를 피해 달리는 버스 [사진/한미희 기자]

시선을 멀리 두고 보는 초원은 그저 평온해 보이지만, 포장된 길이 없는 초원을 달리는 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차가 많이 다닌 곳은 구덩이가 패고, 비가 내린 까닭에 온통 진흙 웅덩이가 만들어지면 그 장애물을 피해서 가는 또 다른 길이 만들어진다. 오래된 중고 미니버스는 맨땅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요동치고, 버스 안에서는 앓는 소리가 난무한다.

미처 장애물을 피하지 못해 땅콩 보트를 탔을 때처럼 몸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진다. '잘 수 있으면 자보시지' 미션에 실패한 사람들은 마주 보며 웃는 수밖에 없다. 버스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걸 게워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8시간 이상 오프로드를 달린 중고 버스는 이삼일 만에 종종 불안한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버스 기사는 차에서 내려 바닥을 살피고 바퀴를 조여야 했다. 피곤한 일정에 지쳐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몽골의 초원은 버스 안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비를 맞으면서도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만드는 곳이었다.

구조한 황조롱이 [사진/한미희 기자]
구조한 황조롱이 [사진/한미희 기자]

◇ 초원에서 벌어지는 일

길이 90㎞, 폭 60㎞에 달하는 메넨 대초원은 몽골 영양(차강제르)의 70%가 서식하고 있고, 온갖 철새를 비롯한 희귀 동식물이 사는 절대보호구역이다.

터키에서 온 새 전문가 에민이 여행에 함께한 덕에 일행들은 하늘을 날고 있거나 수풀 사이에서 쉬고 있는 온갖 새는 물론, 땅속 구멍에 숨어 있는 '페레 다비드의 스노 핀치' 같은 낯선 이름도 하나씩 익혔다.

선두 차량이 갑자기 멈추고 에민을 급히 불러냈다. 날개를 다친 황조롱이 한 마리가 길가에 앉아 있었다. 구조한 황조롱이를 숙소에 데려와 수의사를 수소문했지만 가까운 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의사가 와 응급 처치를 하는 모습을 다 함께 지켜봤다. 멀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날, 시간이 많이 지체됐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시간 약속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기도 했다.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넓은 꽃밭을 이룬 허멀 [사진/한미희 기자]
드넓은 꽃밭을 이룬 허멀 [사진/한미희 기자]

평평한 땅과 하늘뿐인 초원의 풍경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지만,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에 따라 농도가 다른 초록빛으로,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다르게 보인다. 그중에서도 연보랏빛 꽃을 피운 '허멀'(야생 마늘의 일종)이 군락을 이룬 곳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드넓게 펼쳐진 꽃밭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허멀은 훌륭한 향신료이자 가축에게는 좋은 먹이다. 양파 냄새와 비슷한 향이 나는데 그대로 호쇼르나 허르헉 등 고기 요리에 넣는다. 허멀을 먹고 자란 소나 양은 고기 맛도 더 좋다고 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초원과 직접 그 위에 서서 바람을 맞을 때도 다르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이곳에서 휴게소나 식당은 만무한 일. 잼을 바른 뻣뻣한 빵 한조각과 인스턴트 커피뿐인 점심 식사도 드넓은 초원에서라면, 꼬이는 파리 떼가 반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멋진 피크닉이 된다. 한국산 컵라면이라도 곁들이면 진수성찬이다.

초원의 귀한 화장실 [사진/한미희 기자]
초원의 귀한 화장실 [사진/한미희 기자]

초원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큰 도전은 화장실이다. 대초원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가이드는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화장실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남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걸으면 그곳이 바로 화장실.

아무리 걸어도 은밀한 사생활을 지켜줄 엄폐물은 찾을 수가 없다. 창밖을 바라보다 낯 모르는 이의 엉덩이부터 보게 되는 일도 내 뜻과는 상관없이 벌어진다.

근처에 작은 마을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운까지 좋다면 아주 드물게 삼면과 천장을 판자로 막은 공중화장실을 찾을 수 있는데, 화장실의 뻥 뚫린 입구가 왜 하필 길을 향하고 있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 중국 접경 마을 할흐골

대초원에서 버스가 길을 잃고 헤매다 한밤중에야 도착한 곳은 부이르 호수. 몽골에서 다섯번째로, 동부 지역에서는 가장 큰 호수다. 호수와 주변 습지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돼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숫가로 향했다. 너른 모래사장과 밀려오는 물결 너머 끝이 보이지 않으니, 바다라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땅은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다. 지난밤 부이르 호수 인근에 도착했을 때부터 휴대전화는 중국 통신망의 신호를 잡았고, 중국 내 여행 유의·자제 지역을 알리는 외교부의 경고 문자가 들어왔다.

대형 보살상 잔라이섹 [사진/한미희 기자]
대형 보살상 잔라이섹 [사진/한미희 기자]

할흐골로 가는 길, 할흐강 서안 야트막한 언덕에 기대 누운 대형 보살상 '잔라이섹'이 있는 이크 부르크한트에서 각자의 소원을 빌러 온 현지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우유나 곡식을 하늘에, 땅에 뿌리며 비가 더 내려주기를, 도시로 떠난 자식들이 안녕하기를 빌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중년 여성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고흥 유자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두 손을 모아 반가워했다.

한반도의 끝에 살던 몽골 사람과 몽골의 끝에 온 한국 사람이 만나는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홍조까지 띤 얼굴로 한국이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데,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 그렇게 다가와 준 그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잔라이섹 앞에서 기도하는 몽골인들 [사진/한미희 기자]
잔라이섹 앞에서 기도하는 몽골인들 [사진/한미희 기자]

'동쪽'이라는 뜻의 도르노드주에서도 중국과 국경을 접한 할흐골은 1939년 소련과 몽골 연합군이 일본-만주군과의 국경 분쟁에서 크게 승리한 곳이다. 전쟁 기념탑과 소련군 전사자들의 묘지는 물론, 포탄이 떨어진 곳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주도인 초이발산에서도 기념탑을 보수하고 벌판에는 당시 소련군의 탱크를 전시하는 등 승전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할흐골 시내 한쪽에서는 여전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개발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루도 같지 않은 초원의 석양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비를 뿌리고 나자 구름은 하늘을 가린 구름인지 바다에 떠 있는 섬인지 헷갈리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석양이 분홍빛에서 붉은빛으로 더욱더 짙어지자 결국 차를 세우고 가장 붉게 타오르는 시간을 보냈다. 초원의 석양은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흥이 넘치던 사람들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길, 흙탕물이 튀어 지저분한 창문 너머로 며칠째 봐 온 똑같은 풍경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좁은 버스 좌석에서 몸을 구기고 뒤척이며 조금이라도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는 몸부림은 여행 내내 계속됐다. 마침내 두 다리와 몸을 버스 좌석과 기둥에 단단히 고정해 어떤 흔들림에도 요동치지 않는 안정적인 자세를 찾았을 때, 길고 긴 여정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대초원의 석양 [사진/한미희 기자]
대초원의 석양 [사진/한미희 기자]

◇ 울란바토르

몽골은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적어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하지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사는 울란바토르는 상황이 다르다.

더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울란바토르로 모여들어 도시 외곽에 게르를 짓고 살면서 심각한 대기오염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맹혹한 한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저질의 석탄은 물론 신발, 폐타이어 등을 가리지 않고 태우기 때문이다.

최근 울란바토르의 한겨울 대기 오염은 베이징의 5배 수준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즘 울란바토르에서는 현대식 아파트와 주택, 빌딩을 지어 올리는 공사가 곳곳에서 한창이다.

헬기를 타고 본 울란바토르의 모습. 고층 빌딩이 들어선 시내 중심부와 게르가 모여있는 외곽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사진/한미희 기자]
헬기를 타고 본 울란바토르의 모습. 고층 빌딩이 들어선 시내 중심부와 게르가 모여있는 외곽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사진/한미희 기자]

◇ 몽골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아리랑

몽골 전통 공연단 '투멘 에흐'는 노래와 춤, 악기 연주, 곡예까지 몽골 전통 예술의 모든 것을 한자리에서 보여 준다.

특히 성대에서 높은음과 낮은음을 동시에 내는 '허미'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예에 가깝다. 본체는 사다리꼴에 악기 끝은 말머리로 장식한 모린 쿠르(마두금)는 2천년 전부터 연주했다는 가장 오래된 전통 악기다.

공연 막바지, 세계 각국의 유명한 음악을 메들리로 들려주는데 '아리랑'이 가장 먼저 연주됐다. 이국의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아리랑은 왠지 더 찡했다. 낯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친숙한 것이어서 그랬을까.

처음 악기가 등장했을 때부터 해금처럼 생긴 악기(후치르)가 너무 익숙하다 싶더니, 해금이 몽골계 유목 민족이 사용한 악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야탁도 가야금과 매우 닮았다.

전통 공연단 '투멘 에흐' [사진/한미희 기자]
전통 공연단 '투멘 에흐' [사진/한미희 기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10/12 08: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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