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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민주공화제·좌우 합작 의의

송고시간2019-04-10 15:51

"1919년 9월 통합한 임시정부는 시민사회가 동의한 국가"

"임정 요인 삶 기억하고, 성과와 한계 분석해야"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함'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함'

(양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조소앙 선생의 후손 조인래 씨가 한국근현대사 사료 가치가 높은 임시정부 기록물을 연합뉴스에 단독으로 공개했다. 사진은 조인래 씨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지박물관 수장고에서 공개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조소앙 선생이 기초했다. 2019.4.10 andphotodo@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민주공화제라는 용어를 헌법에 명기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실상 처음이에요.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임정은 왕이나 귀족이 아닌 국민이 주권을 갖는 나라를 바랐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 교양서 '1919'를 펴낸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9일 간담회에서 임정이 임시헌장 첫머리에 내세운 민주공화제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한민족이 일제에 대항해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 발생 후 한 달 남짓 지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모인 사람들은 조소앙이 초안을 작성한 임시헌장을 심의해 통과시켰다.

임시헌장은 정치체제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 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라고 명시했다.

민주와 공화, 평등과 자유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 계승', '기회균등', '자유와 권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10일 학계에 따르면 이나미 한서대 연구교수는 학술지 '내일을 여는 역사' 최신호에 게재한 글에서 "3·1운동은 한국 시민사회가 건재함을 알린 사건이고, 시민사회가 지지하고 동의한 국가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라며 "임정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면, 한국인들의 개별적 또는 집단적 독립운동은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이 일본과 전쟁을 한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1944년 6월 알제리에서 성립된 프랑스 임시정부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상이 확고하다면서 "임정은 그 역할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임시정부는 한시적이기는 하나 좌우합작적 성격을 가진 정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현 정부가 임시정부 수립일로 새롭게 정한 4월 11일은 상하이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이고, 이에 앞서 러시아에서는 3월 17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임시정부 성격을 띤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했다. 이어 한성에서는 4월 23일 13도 대표자들이 국민대회 형식을 빌려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했다.

이처럼 중국·러시아·한성에서 각각 출범한 임시정부는 1919년 9월에 통합을 이뤘다.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되 정부 위치는 상하이에 두었다. 통합 임시정부는 이동휘가 11월 3일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정식으로 닻을 올렸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내일을 여는 역사'에 실은 글에서 "독립운동사에서 통합적 성격의 임시정부를 찾는다면 첫째가 1919년 11월 초부터 1921년 1월까지이고, 두 번째는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 정당들이 우파의 한국독립당이 주도한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성립한 좌우 합작 정부"라고 설명했다.

반 교수는 "첫 번째 통합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대한 영향력이나 권위의 면에서 절정에 있었다"며 "전체 민족해방운동사상 최초의 통일전선조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복원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내부
복원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내부

(충칭[중국]=연합뉴스) 김승두 기자 = 29일(현지 시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복원된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내부. 광복군 관련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2019.3.29 kimsdoo@yna.co.kr

임시정부는 통합 초기에 내무부와 교통부 산하에 각각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을 만들어 국내 행정을 장악하고 정보와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다. 또 미국·중국·소련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이동휘가 임정 쇄신안이 채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퇴하고, 유동열·김규식·남형우·안창호가 사퇴하면서 분열이 이뤄졌다. 게다가 이승만을 반대한 신채호는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와 신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가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열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고, 이후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자는 유일당 운동과 의열투쟁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부터 항저우(杭州),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등지를 돌다 1940년 내륙 도시인 충칭(重慶)에 터전을 잡았다. 광복군을 창설해 본토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외교적 노력을 벌인 임시정부는 주체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으나, 광복 이후 들어선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시정부는 학계에서 활동상에 비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국민이 주인이 되는 체제인 민주공화제를 갈망하고 고수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놓았다고 평가된다.

이와 관련해 정부가 지난 8일 발표한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임정 수립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가는 시작점'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계 관계자는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외국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열사들의 고단한 삶을 기억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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