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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덤 청동용기, 11세기 초 기점으로 변화"

중세고고학회 '고려시대 금속기와 수공업' 학술대회
울산 영축사지에서 나온 고려 청동 완
울산 영축사지에서 나온 고려 청동 완고려 청동 완.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려시대 전기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용기를 살펴보면 11세기 초를 기점으로 다른 양상이 확인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중세고고학회가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시대 금속기와 수공업'을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허선영 한국문물연구원 과장은 청동용기가 나온 고려 전기 분묘 유적 20곳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시기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용기는 모두 60여 점으로, 발(鉢)·접시·완(碗)이 주를 이룬다.

허 과장은 "고려가 건국한 918년부터 11세기 초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중 청동용기를 껴묻거리로 묻은 유구(遺構·건물의 자취)는 6기"라면서 "무덤은 용인, 평택, 아산, 대전 등 중서부 지방에 편중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청동유물은 보통 유구에 1점 정도만 부장했으며, 형태는 통일신라시대 영향을 받았다"면서 "이러한 현상은 도기병과 청동숟가락에서도 확인된다"고 말했다.

그는 11세기 초반∼11세기 후반에 조성한 무덤 중 청동용기가 나타난 유구는 31기라면서 "무덤 분포를 보면 강원도 1기, 충청도 16기, 경상도 9기, 전라도 5기로 범위는 넓어졌으나, 여전히 중서부에 치우쳐 있다"고 설명했다.

허 과장은 이 시기 청동기는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군위 인각사 금동병향로처럼 리벳을 사용해 기물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며, 통일신라 영향은 거의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전까지 리벳은 상위계층이 사용하는 물품에만 쓰였다.

즉 11세기 초를 기점으로 무덤에 청동용기를 넣는 지역이 넓어졌고, 물품도 독자적인 면모를 띠게 됐다는 것이다.

허 과장은 이 같은 변화 요인으로 장인들을 한 관청에서 관리하면서 이뤄진 수공업 발전, 북방과 교류를 꼽은 뒤 고려 전기에는 청동용기가 모든 계층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는 변했지만, 문화는 일정한 영역을 공유하다가 11세기를 기점으로 고려왕조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갔다"고 추정했다.

이에 대해 차순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단장은 "통일신라시대 제작한 청동용기는 대부분 주조작업으로 외형을 만든 후 방짜작업 등을 통해 형태를 완성했지만, 11세기 고려 청동용기는 앞 시기보다 넓고 얕은 기형에 얇은 기벽을 갖춘다"며 "이는 사회 안정과 더불어 제작기술 발전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시대에도 폭넓게 사용된 리벳 결합법이 고려시대 전기에 이미 출현했음을 확인한 점은 중요하다"며 "11세기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고려 청동용기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3/31 08:1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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