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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대한 사대로 인조실록 병자호란 기록 변조"

계승범 서강대 교수, 논문서 조선왕조실록·청실록 비교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인조 14년(1636) 청이 대군을 이끌고 한반도를 침략한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함께 조선이 겪은 가장 큰 전쟁으로 꼽힌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한 인조가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며 마무리된 전쟁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고, 논문도 많이 발표됐다.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한다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이 전쟁을 야기했고 조선 조정이 기울인 군사적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 통념이지만, 인조도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펼치려 했다거나 전쟁의 원인을 홍타이지의 정치적 야망에서 찾아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조선과 청이 전쟁 당시 주고받은 국서를 기록한 양국의 역사서를 비교하면 조선이 명에 대한 사대를 국가 정체성으로 삼았음이 명확히 드러난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시대사를 전공한 계승범 서강대 교수는 동양사학회가 지난 1월 펴낸 논문집에 게재한 논문 '같은 전쟁 다른 기록'에서 "청은 인조가 보낸 국서 내용을 전혀 변조하지 않고 전재한 데 비해, 조선은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 내용을 노골적으로 변개해 공식 자료로 남겼다"고 강조했다.

계 교수는 인조실록과 청실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진 '순치초찬한문태종실록'(順治初纂漢文太宗實錄, 이하 순치본)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홍타이지의 첫 서신만 놓고 봤을 때 순치본 한자는 714자인데, 인조실록은 56%인 398자"라며 "문제는 인조실록은 홍타이지의 서신에 없는 내용을 새로 삽입하거나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상세하게 부풀려 추가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삽입 부분을 제거한다면 애초 서신 내용 중 거의 70%를 누락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인조실록 편찬자들이 다분히 특정 의도를 갖고 서신 내용을 심각하게 손질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인조실록이 홍타이지 서신에서 대폭 삭제한 내용은 무엇일까.

"너희 조선은 예로부터 세세토록 타국에 공물을 보내어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서도 스스로 보존한 적이 여태껏 있었는가"와 "아녀자처럼 도망쳐 회피하는가. 네가 비록 이 성에 은둔해 화를 피했다고 한다면, 짐이 너를 간과하고 돌아가겠는가"라는 문장이 있는 서두를 싣지 않았다.

계 교수는 "인조실록은 서신 중 조선이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을 적시하고, 변란을 초래한 책임은 천명이 바뀐 현실을 도외시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인조에게 있다는 부분을 누락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인조실록에 있는 "명이 선박을 찾아(모아) 우리를 침공함에 너희 나라는 추종해 즉시 배를 제공했다. 짐이 명조를 정벌함에 이르러서는 늘 인색하게 굴며 기꺼이 (배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이는 특별히 명조를 돕고 우리를 해치려는 의도이다"라는 대목은 순치본에 없다고 계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순치본 서신을 전체적으로 일독하면 정묘년 이래 조선의 절화(絶和), 홍타이지의 천자 등극에 대한 거부행위, 조선의 전쟁 준비,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선택 등이 홍타이지가 친정을 감행한 주요 동인이자 명분으로 나온다"며 "그러나 인조실록을 보면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 한 것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친정한 핵심 요인으로 읽힌다"고 주장했다.

계 교수는 그러면서 "조선은 금수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교화된 인간으로 죽겠다는 이념적 선택을 했다"고 역설했다.

이와 관련해 허태구 가톨릭대 교수는 학술지 '군사' 최신호에 실은 논문에서 "조선의 군사력 정비 과정, 병력 확보와 군량 공급 면에서 인조대 초반은 광해군대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며 병자호란 당시 군비 확충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호란 시기 척화론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종속 의식이나 국제 정세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명이란 기표(記標)로 상징되는 중화문명의 가치를 당대 조선 군신이 공유한 데서 나왔다고 봐야 한다"며 "척화론자들이 걱정한 것은 대명의리의 포기가 상징하는 윤리와 문명의 붕괴였다"고 주장했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3/17 06:57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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