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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6)윤봉길 태극기앞 결의사진 찍은 그곳

임정 한인애국단 본부, 상하이 헝칭리 20호로 확인…지금은 도로로 변해
애국단 합숙소 건물은 옛 모습 간직한 채 남아 있어…임정 청사서 '지척'
윤봉길 의사 훙커우 의거 전 기념사진 찍은 상하이 헝칭리 자리
윤봉길 의사 훙커우 의거 전 기념사진 찍은 상하이 헝칭리 자리(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윤봉길 의사가 1932년 훙커우 의거 직전 태극기를 배경으로 촬영한 '의거 결의 사진'(왼쪽). 이 사진을 촬영한 상하이 헝칭리 한인애국단 본부가 있던 자리.(오른쪽 사진 속 붉은색 동그라미) 2019.3.14
cha@yna.co.kr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훙커우 공원 의거' 3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임정의 비밀 의열조직인 한인애국단 단장 백범 김구가 청년 윤봉길을 데리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한 중국식 연립주택에 숨어들었다.

한인애국단의 본부 격인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으로 한인애국단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던 안공근의 집이었다.

김구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가운데 이 집 2층에서는 엄숙한 의식이 거행됐다.

윤봉길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중국을 침략한 '적장'(일본군 장군)을 처단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묵묵히 붓으로 써 내려갔다.

이어 말쑥한 양복 차림의 윤봉길은 벽에 걸린 태극기 앞에 섰다.

자신이 쓴 선언서를 목에 건 윤봉길은 오른손엔 권총을, 왼손엔 수류탄을 각각 들고 의거에 나서기 전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같이 내놓기로 각오했던 많은 한인애국단 단원들이 윤 의사처럼 같은 장소에서 입단 의식을 거행하고 의거에 나섰다.

1932년 1월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 의사도 같은 곳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양손에 수류탄 든 이봉창 의사
양손에 수류탄 든 이봉창 의사(상하이=연합뉴스)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에 나서기 전 중국 상하이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입단식을 거행하고 촬영한 기념사진. 2019.3.14 [독립기념관]
cha@yna.co.kr

만주 방면으로 파견돼 일제 관동군사령관과 관동청 장관 등을 처단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힌 최흥식 의사도 같은 장소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촬영했다.

한인애국단원들이 최후의 결의를 다진 이곳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뜻깊은 공간이지만 그간 우리 역사학계는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비밀리에 주고받은 편지와 전보, 일본 경찰의 수사 기록 등에는 이 집의 주소가 일관되게 '신톈샹리(新天祥里·신천상리) 20호'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1920년대 상하이 지도에는 '天祥里(톈샹리·천상리)'라는 골목은 있었지만 '신톈샹리'라는 지명이 없었다.

의문은 최근 우리 역사학자들과 중국인 역사학자들 사이의 교류 과정에서 풀렸다.

한인애국단 본부가 있던 상하이 헝칭리 20호
한인애국단 본부가 있던 상하이 헝칭리 20호(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1920년대 상하이시 지도에 한인애국단 본부가 있던 '헝칭리 20호'(붉은 색 동그라미 표시)가 나와 있다. 2019.3.14
cha@yna.co.kr

한인애국단이 활발하게 활동한 1920년대 톈샹리 바로 옆에 새로 건설된 연립주택 골목을 당시 주민들이 '신톈샹리'라고 불렀는데 훗날 '헝칭리(恒慶里·항경리)'라는 정식 명칭이 붙은 것이다.

상하이의 시가 변천 과정의 전문가인 쉬훙신(許洪新)씨는 "헝칭리가 막 만들어졌을 때 톈샹리 바로 옆이어서 '신톈샹리'라는 이름이 임시로 붙여졌는데 당시에는 신톈샹리 몇 번지 식으로 편지를 써도 제대로 배달이 됐다"며 "훗날 헝칭리가 정식 지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확한 위치는 확인됐지만 아쉽게도 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원들이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은 '신톈샹리 20호' 건물은 사라지고 도로로 변해 있었다.

최근 일대 도로가 확장되면서 100년 가까이 된 헝칭리의 연립주택 중 도로 쪽에 있던 일부가 헐렸는데 20호도 철거 대상이 된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이 일제의 탄압으로 극도의 침체기에 빠져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일대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한다.

임정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1931년 11월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진 한인애국단은 널리 알려진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양대 의거 외에도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 기관과 수뇌부 등을 상대로 파상적인 공세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최홍식, 유상근 등 많은 단원이 거사 직전에 일제에 검거되기도 했다.

한인애국단 입단식이 거행됐던 본부 건물은 사라졌지만 항일의 결기로 넘치던 한인애국단원들이 모여 생활하던 아지트 격인 합숙소 건물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한인애국단 단원들의 '비밀 아지트'
한인애국단 단원들의 '비밀 아지트'(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한인애국단원들이 합숙소로 쓰던 옛 사퍼사이루(薩坡塞露·살파새로) 188호. 현재는 1층에 네일샵이 들어서 있다. 한인애국단원들은 이곳 2층과 3층을 썼다. 2019.3.14
cha@yna.co.kr

흥미롭게도 한인애국단원들의 옛 합숙소는 현재 상하이 임정 청사 기념관이 있는 푸칭리(普慶里·보경리) 4호에서 직선거리로 1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최흥식 등 한인애국단원들이 모여 살던 건물은 옛 사퍼사이루(薩坡塞露·살파새로) 188호였다. 사퍼사이루는 현재 단수이루(淡水路·담수로)로 길 이름이 바뀌었다.

한인애국단원들은 현재 1층에 네일샵이 있는 건물의 2층과 3층을 함께 썼다.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한인애국단원들의 의열 투쟁은 작게는 동력이 사그라들던 임시정부를 살리고 나아가 한국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며 "더 크게는 중국 인민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을 재인식시키는 등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ch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3/14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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