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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1919] 병천에서 만난 '한국의 잔 다르크'

송고시간2019-03-10 08:01

(천안=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충남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 군중 3천여 명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군중 가운데서 만세운동을 이끈 이는 17살 여학생, 유관순이었다.

그 누구보다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천안 병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 [사진/조보희 기자]

천안 병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 [사진/조보희 기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시위대가 이화학당을 지나자 유관순을 포함한 여학생 7명은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는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이미 전날 시위 결사대를 조직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굳게 결심한 터였다.

7인의 결사대는 3월 5일 서울 최대의 남대문역(현 서울역)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날 시위는 3·1운동 학생 대표 강기덕, 김원벽 등이 주도한 것으로, 서울 지역 학생들과 광무황제(고종) 인산(因山, 장례)을 마치고 귀향하던 이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 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

만세시위 행렬은 남대문시장∼한국은행∼보신각, 남대문∼대한문∼을지로 입구∼보신각 등 두 개로 나뉘어 보신각에 모였다.

이렇듯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대거 참여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은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3월 13일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병천으로 향했다. 그들의 품속에는 독립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다.

추모각에 있는 유관순 열사 영정 [사진/조보희 기자]

추모각에 있는 유관순 열사 영정 [사진/조보희 기자]

◇ 모진 고문과 구타의 흔적들

병천은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군중 3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했던 아우내 장터와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 추모각과 초혼묘, 기념관이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 생가 등이 이곳에 있다.

아우내 장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유관순 열사 유적지를 돌아본다. 기념관 앞에는 유관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03년 묻은 타임캡슐이 있다.

2102년 4월 1일 열릴 캡슐에는 그의 호적·제적 등본, 유관순을 소개한 교과서와 위인전기, 영정 기념 우표 등 50종 73점이 담겨 있다.

기념관에서는 우선 서대문형무소 시절의 유관순을 만나게 된다. 초상화를 보면 콧방울이 내려앉았고, 얼굴의 오른쪽이 부어 있다. 오른쪽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하다. 무지막지한 고문과 구타의 흔적이다. 그를 고문하거나 때린 일본 헌병이나 순사가 주로 오른손잡이였던 모양이다.

유관순의 생애와 연보, 가계도가 이어진다. 가계도를 보면 애국장, 애족장, 독립장 등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이 9명이나 된다. 독립군 한 명만 있어도 삼대가 망했다는데 이 집안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도 볼 수 있다. 옆 친구 어깨에 팔을 두른 유관순은 키가 상당히 커 보인다. 수형기록표에는 신장이 5척 6촌(169.7㎝)으로 나와 있다. 이화학당 친구들도 유관순이 키가 크고 장난기가 많았다고 증언한다.

유관순을 이화학당에 진학시킨 선교사 앨리스 샤프 여사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옆에는 '冠順'(관순)이 표기된 아버지 유중권의 호적등본이 전시돼 있다. 이 호적에는 가운데 이름이 갓 관(冠) 자로 표기돼 있다. 하지만 수형기록표, 재판기록문, 족보에서는 너그러울 관(寬)을 쓴다. 본인이 진술해 작성한 기록에 '寬'을 사용해 지금도 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건국훈장 독립장과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마련한 이화학당 명예졸업장, 수형기록표, 유관순 열사 재판기록문도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 추모각 [사진/조보희 기자]

유관순 열사 추모각 [사진/조보희 기자]

◇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 이끌다

그다음 공간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모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관순을 선두로 한 시위대가 일본 경찰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다.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했다.

거사일을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 아우내 장터로 정하고, 청주·연기·목천 등 각 면과 촌에 연락기관을 두는 등 대규모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다.

3월 31일에는 유관순열사유적지 뒤편 매봉산에서 만세시위를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 정오 아우내 장터. 나라를 되찾자는 유관순의 열변에 시위 분위기가 고조됐다. 군중들은 장터 곳곳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병천 헌병주재소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고, 이후 지원군이 합세해 시위자들을 학살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했다.

유관순은 헌병주재소로 돌진해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였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항거했다.

하지만 헌병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군중들이 해산하고, 이날 저녁 유관순을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돼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경성복심법원 항소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민족대표 33인에게 주로 3년형이 선고된 것을 볼 때 17살 소녀에게 주어진 형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기념관에는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는 통)를 쓰고 잡혀가는 유관순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이송할 때 군중의 동요를 막기 위해 머리에 용수를 씌웠다.

유관순의 재판 과정과 옥중 투쟁을 담은 매직비전도 설치돼 있다.

유관순은 재판정과 서대문감옥에서도 저항했다. 공주지방법원에서는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며 일제의 재판을 거부했다.

서대문감옥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3·1운동 1주년 때는 수감된 이들과 함께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박선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감옥 8호 방에 있었는데 방 번호순으로 차례로 만세를 부르며 감옥 전체가 메아리치게 했다"며 "이후 지하 독방에 보내지고 엄청난 고문과 구타를 당했지만 독립 의지는 꺾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시신 사라지고 초혼묘만 덩그러니

유관순은 결국 9월 28일 아침 숨을 거뒀다. 사인은 방광 파열로 기록됐지만 사실은 고문과 구타로 인한 상처와 후유증을 제때 치료하지 않은 탓이었다.

기념관에는 서대문감옥 고문실인 벽관이 재현돼 있다. 벽관은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정도 크기로 홈을 파고, 그 속에 독립운동가를 가둔 일제의 고문 도구다. 2∼3일 갇혀 있으면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 끝에 전신이 마비된다고 한다.

한쪽에는 특이하게 실로 짠 모자 하나가 전시돼 있다. 이화학당 시절 사촌오빠 유경석의 아들이 태어나자 손수 모자를 짜서 선물했다고 한다. 뜨게 모자 옆에는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제작을 위해 고증을 거쳐 만든 흰색 치마저고리와 갖신이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면 추모각이 나타난다. 태극기를 두손으로 꼭 쥔 유관순 열사의 표정이 사뭇 당차 보인다. 유적지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순국자 추모각도 있다.

추모각 뒤편 돌계단을 오르면 유관순의 영혼을 위로하는 초혼묘가 있다. 순국 후 유관순은 정동교회에서 장례를 치른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감옥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사람은 모교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였다. 만세운동에서 부모를 잃고 형제들도 죽거나 끌려가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월터는 일제가 시신을 내주지 않자 전 세계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유관순이 묻힌 지 1년도 되지 않아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지로 개발했다. 유관순의 묘는 무연고 묘로 처리돼 사라지고 말았다. 1989년 마련된 초혼묘에는 태극기와 열사의 사주단자가 모셔져 있다.

초혼묘에서 산길을 조금 더 오르면 봉화대가 있는 매봉산 정상이다. 이곳에선 아우내 장터와 인근의 너른 평야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선 매년 3월 마지막 날 봉화를 올리는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매봉산 너머에는 유관순 생가가 자리한다. 일본 경찰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직후 가장 먼저 유관순의 생가와 매봉교회를 불태웠다고 한다.

현재의 생가는 1991년 복원한 것이다. 생가는 방 2칸, 부엌, 헛간으로 구성된 조그만 초가다. 안방에서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건넌방에서는 유관순이 태극기를 제작하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생가 바로 옆에는 역시 현대식으로 건축된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이 어릴 적 놀이터로 삼았던 교회다. 지하에는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 관한 자료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아우내 장터 입구에는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유관순이 끌려간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공원에는 횃불을 든 유관순과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을 형상화한 동상 등이 들어서 있다. 병천에서 가장 유명한 순대를 내는 식당도 이 근처에 모여 있다.

유관순 생가 [사진/조보희 기자]

유관순 생가 [사진/조보희 기자]

◇ 저항의 역사 깃든 독립기념관

차로 10분 거리에는 독립기념관이 있다. 3·1운동은 물론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펼쳐진 항일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국난 극복의 역사와 각종 문화유산이 전시된 제1관을 지나면 독립운동과 관련된 전시가 시작된다.

경운궁 중명전에서의 을사늑약 장면을 볼 수 있고, 서대문감옥과 일본군 위안소가 재현돼 있다.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항일무장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5분 거리에는 석오 이동녕 기념관이 있다. 이동녕은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해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고 신민회 조직에 참여한 인물이다. 3·1운동 후에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이끌었다.

기념관에는 석오의 친필 휘호와 서신, 초상화, 사진, 임시정부 문서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부근에는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흑성산에서 내려다본 독립기념관 [사진/조보희 기자]

흑성산에서 내려다본 독립기념관 [사진/조보희 기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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