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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④일본 경찰도 굴복한 양양 만세운동

송고시간2019-02-21 06:00

연인원 1만5천명 참여·사상자 200여명…치열했던 3·1운동 성지

버선 솜에 독립선언서 감춰 온 조화벽 선생…만세운동 불씨 지펴

양양 만세고개 3ㆍ1절 기념식
양양 만세고개 3ㆍ1절 기념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양양=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강원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을 시작으로 남녀노소, 종파와 신분의 구별 없이 하나가 돼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양양 만세운동은 그 규모가 도내 최대일 뿐 아니라 격렬함이 전국적으로도 손꼽힐 정도로 전개됐다.

시위대의 치열한 만세운동에 경찰서장이 "일본으로 물러날 테니 만세만 외치고 돌아가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영동권에서 최초로 일어난 양양 만세운동은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1만5천여 명이 함께 했다. 군내 6개 면의 모든 주민이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여 명이나 되는 사상자는 강원도 전체 3·1운동 사상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강원 만세 봉기 조형물
강원 만세 봉기 조형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 "일본으로 물러가겠다"…경찰까지 굴복시킨 만세운동

뜨거운 양양 만세운동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서 시작했다.

1919년 3월 양양면 임천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준비하던 지도자 22명을 일제가 체포하고 태극기 374장을 압수하자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군민 1천6백여 명이 봉기해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곧 수천 명으로 빠르게 늘었고, 양양경찰서를 포위해 체포된 애국지사들을 탈출시키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농민 5명이 순국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5일에는 강현면 농민 5백여 명이 물치 장터에 모여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도천면 농민 5백명은 대포리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강현면 농민들이 합류해 시위대 1천명이 주재소를 에워싸고 일제 경찰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자 경찰서장이 "돌아가겠다"고 굴복했고, 이들은 다음날 양양읍에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다.

6일, 7일 이틀 사이에는 농민 1천500여 명이 양양경찰서를 습격해 애국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7일 밤에는 의병 출신 박춘실이 이끄는 서면 농민 1백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해 파괴했다.

4월 9일에는 현북면 농민 6백여 명이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켜 기사문리의 일제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를 외쳤다.

이때 언덕 밑 계곡에서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현장에서 9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여성 독립운동가' 조화벽 지사
'여성 독립운동가' 조화벽 지사

[여성가족부 제공]

◇ '강원도의 횃불'…버선 솜에 독립선언서 숨겨 온 조화벽 선생

이토록 뜨거웠던 양양 만세운동의 뒤에는 '강원도의 횃불' 조화벽 선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유관순 열사와 올케 사이인 조화벽 선생은 양양 출신으로, 개성의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며 '호수돈 비밀결사대' 일원으로 3·1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선생은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버선 솜 속에 감춰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목숨을 걸고 감춰온 독립선언서는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가 됐다.

집으로 돌아온 조화벽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고향의 청년지도자들에게 전달하고 양양 보통학교 학생들, 지역 유림과 연대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4월 4일 양양 남문리 장터에서부터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후 조화벽 선생은 양구로 은신했다가 개성으로 돌아가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유관순 열사의 오빠이자 평생의 반려자인 유우석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가 1925년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정명학원은 1944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만세고개 3.1 운동 기념탐
만세고개 3.1 운동 기념탐

[연합뉴스 자료사진]

◇ 만세고개·현산공원…100년 전 함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

동해고속도로 현남 나들목을 나와 오른편에 바다를 두고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기사문항이 나온다.

그곳에서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조준과 하륜의 전설이 남아 있는 하조대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관고개였는데 광복이 되자 자연스럽게 만세고개로 이름이 바뀌었다.

1천여 명의 만세 군중이 이 고개를 넘던 중 잠복해 있던 일경의 발포에 9명이 숨졌다.

2000년 3월 1일 만세고개 인근에 태극기를 본뜬 기념탑을 세우고 당시 순국하거나 다친 사람들의 명단을 새겨 3·1만세운동 유적지로 조성했다.

양양 옛 관아터인 군의회 건물 옆에 자리한 현산공원에도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조성돼 있다.

현산공원은 양양 만세운동이 태동한 곳으로, 1919년 2월 20일 지역 유림 20여명이 모여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는 '망곡'을 한 뒤 유림 10여명을 서울로 보냈는데 이것이 만세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양양 만세운동으로 희생되거나 투옥된 선열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74년 이곳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만세고개와 현산공원에서는 매년 삼일절마다 선열의 희생과 뜻을 기리기 위해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연합뉴스 자료사진]

y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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