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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⑪근대문화유산으로 남은 수피아여고

일제의 칼에 한쪽 팔 잃고도 남은 팔로 만세 외친 '조선의 혈녀'
"숭고한 정신, 학생 독립운동·1980년 5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1919년 만세운동을 재연하는 광주 수피아여고 학생들
1919년 만세운동을 재연하는 광주 수피아여고 학생들[연합뉴스 자료사진]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일본 헌병이 휘두른 군도에 왼팔을 잃은 여학생은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손에 쥐어졌던 태극기를 다른 손으로 다시 집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마저 외쳤어요."

홍인화 수피아여자고등학교 역사연구소장은 광주에서도 1919년 3월 들불처럼 타올랐던 만세운동의 한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100년 전 그날 만세 행렬을 앞장서서 이끈 주인공은 '조선의 혈녀(血女)'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수피아여학교 2학년 윤형숙(1900∼1950) 열사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오른쪽 눈까지 잃은 윤 열사는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고향인 전남 여수로 돌아가 온전치 않은 몸으로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윤 열사의 굴곡진 삶은 민족이 다시 한번 비극을 마주한 1950년 막을 내렸다. 서슬 퍼런 일제조차 앗아가지 못한 그의 생은 인민군 총탄에 의해 스러졌다.

독립유공자 윤형숙 열사와 추모비
독립유공자 윤형숙 열사와 추모비[국가보훈처 블로그]

민족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린 1919년 전국적인 만세운동은 광주에서 윤 열사를 비롯한 수피아여학교 학생과 교사가 출발점에 섰다.

지역 출신 일본 유학생 정광호가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광주에서도 만세운동의 싹이 움텄다.

수피아여학교 박애순 교사는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파리에서 열린 만국 강화회의를 설명하며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르쳤다.

그해 1월 승하한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던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로 뜻을 굳혔다.

큰 장이 열리는 3월 8일로 예정했던 광주 만세운동은 서울과 연락을 주고받던 최흥종 장로가 상경해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되면서 광주천 부동교 아래에 작은 장터가 서는 10일로 늦춰졌다.

1919년 광주 부동교의 모습
1919년 광주 부동교의 모습[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제공]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거사를 하루 앞둔 9일 밤 학교 건물이자 기숙사였던 수피아홀의 지하 예배당에 모여 고종 황제 장례식 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 오후 2시에 접어들자 윤 열사를 포함한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소매 안에 태극기를 말아 감추고 교정에 모였다.

치마저고리 차림의 학생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양림교와 광주천변을 거쳐 부동교로 향하면서 광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 기독교인, 주민 등 1천여명이 넘는 인파도 부동교로 모여들었다.

오후 3시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든 군중은 양팔을 치켜들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1919년 만세운동을 재연하는 광주 수피아여고 학생들
1919년 만세운동을 재연하는 광주 수피아여고 학생들[연합뉴스 자료사진]

광주경찰서가 자리했던 지금의 충장로우체국 방면으로 만세 물결이 파도처럼 들이쳤다.

기세에 눌렸던 일제 군경은 만세 행렬이 경찰서 쪽으로 다가오자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행렬 선두에서 한쪽 팔이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 열사의 기개는 일제 군경마저 놀라게 했다.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튿날 본국에 보낸 급전에는 '광주에서 야소교(기독교)가 주도한 군중 폭동이 일어나 조선인 1명이 부상했으며, 경찰이 시위를 해산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쪽 팔을 잃은 윤 열사가 남은 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자 몸을 숙이는 모습은 2014년 고향 여수에 건립된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조형물에도 새겨져 있다.

여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조형물에 새겨진 만세운동 당시 윤형숙 열사의 모습
여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조형물에 새겨진 만세운동 당시 윤형숙 열사의 모습[국가보훈처 블로그]

10일 하루에만 100명이 넘게 붙잡혀 갔으나 광주의 민중은 다음 날과 13일 장날에도 떨쳐 일어나 만세를 외쳤다.

광주에서 타올랐던 만세운동의 흔적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수피아여고로 맥을 이어온 남구 양림동 교정에서 만나볼 수 있다.

수피아여학교는 1919년 3월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전교생이 참여하고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학교 문을 스스로 닫았다.

학교는 해방을 맞은 1945년 8월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동문과 재학생, 교사, 지역사회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수피아여고 교정 초입에 7.3m 높이의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광주 수피아여고의 만세운동 기념탑(왼쪽)과 수피아홀
광주 수피아여고의 만세운동 기념탑(왼쪽)과 수피아홀[연합뉴스 사진]

여학생 4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청동상으로 꾸민 기념비의 좌대에는 학생 20명, 교사 2명, 졸업생 1명 등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을 새겼다.

1911년 세운 이 학교 최초의 건물 수피아홀은 근대문화유산인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돼 태극기를 만들던 학생들이 밤을 지새운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독립운동 분야 현충 시설이기도 한 수피아홀은 '만세 시위 준비지'로서 지금은 학교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홍인화 수피아여고 역사연구소장은 "맹인, 기생 등 각계각층이 합세한 만세운동은 광주정신으로 살아남았다"며 "숭고한 정신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1980년 5월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hs@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2/24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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